르누아르, 퐁네프_국립 미술관(워싱턴, 미국)
출처 / 위키피디아
“자연과학의 발달, 시민사회, 사진기의 등장. 그리고 더 개인적인 그림”
19세기 사진술의 발달은 기계가 해낼 수 있는 회화의 위치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작품이 가진 의미보다는, 그 의미있는 대상을 어떤 눈으로 보는지가 더 중요해졌죠. 이런 후기 인상주의의 기법은 명확하게 정의할 수는 없으며 주제에 대해서도 일관성이 없어요. 그러나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은 이전 세대에서는 ‘고급스러운 미술’에는 적당하지 않다고 여겨졌던 주제에 관심을 가졌다는 것이에요. 추하고 우아하지 않은 사람, 이상한 사람이나 기괴한 것, 이 모든 것들은 그들만의 감각과 정서, 분위기를 표현하는 재료를 찾으려는 노력의 일환이었습니다. 모두가 열광하는 모네와 반 고흐, 고갱 등 인상주의를 이끌었던 화가들의 이야기. 지금 시작됩니다!
빛의 화가들
인상주의 그림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모네의 그림을 가까이서 보면 여러 색을 아무렇게나 모아놓은 것처럼 느껴지지만, 조금 떨어져서 보면 환한 빛을 받은 사물들이 제 모습을 드러내요.
오랜 세월 고생하면서도 누구보다 ‘인상주의적’ 화가로서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간 모네와 확신에 찬 그의 곁을 함께한 바지유와 시슬레, 르누아르 등 인상파 화가들은 우리에게 ‘길을 헤매지 않고 곧바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알려줘요. 특별한 눈, 위대한 손, 위대한 눈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스스로 자각하는 순간 열리는 것들이죠. 그 깨달음을 얻은 모네의 여정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지만, 그를 통해 우리는 빛이 있다고 믿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어요.
# 클로드 모네 Claude Monet
출처: 위키피디아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로, 그의 작품 <인상: 해돋이>에서 ‘인상주의’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빛은 곧 색채’라는 인상주의 원칙을 끝까지 고수했으며, 연작을 통해 동일한 사물이 빛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 탐색했어요.
명암 표현으로 마치 실체를 가진 듯 그려낸 <건초더미> 등 연작들은 회화 역사의 이정표로, 제1차 세계대전의 전사자들을 추모하며 그린 생애 마지막 작품인 <수련>연작은 자연에 대한 우주적인 시선을 보여준 위대한 걸작으로 평가받습니다.
폴 세잔은 빛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모네의 능력에 감탄하면서 “모네는 신의 눈을 가진 유일한 인간”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어요.
인상, 해돋이_클로드 모네
수련_클로드 모네
건초더미_클로드 모네
루앙 대성당 연작_클로드 모네
#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Pierre-Auguste Renoir
출처: 위키피디아
밝고 화사한 색조로 여인의 아름다움을 즐겨 그린 인상주의 화가로, 모네의 절친이자 동료 화가로서 어려운 시절을 함께했습니다.
그의 작품 <양산을 쓴 리즈>는 인상주의 화가들이 외광회화로 유명해지는 데 일조했어요. 인상주의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한 화가였지만 르누아르는 18세기 고전 미술로 관심을 돌려 보다 견고한 작품을 만들어냈습니다.
가난한 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나 초반엔 생계를 위해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곤 했으며, 프로이센 전쟁에서 친구 바지유를 잃고 난 후에는 배우가 되어 연극과 영화에 참여하고, <남부사람(1945)>로 아카데미상을 받으며 프랑스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영화감독이 되었습니다.
양산을 쓴 리즈_오귀스트 르누아르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_오귀스트 르누아르
# 에드가 드가 Edgar Degas
출처: 위키피디아
가장 뛰어난 데생 화가 중 한 명으로 고전주의 미술과 근대 미술 사이에서 연결고리 역할을 했습니다. 무대 공연이나 여가 활동의 공간 등 당시 파리의 분주한 삶과 일상을 그리는 것을 좋아해서 도시의 관찰자라고 불리기도 해요.
앵그를 존경했고 이탈리아 거장들의 작품을 모사하며 실력을 키웠지만, 들라크루아의 그림에 빠지며 마네와 친구가 되고 새로운 미술에 눈뜨게 됩니다.
색다른 시점의 구도와 빠른 붓질로 그려진 그림으로 호평을 받았어요. 여성혐오증이 있었으나 역설적이게도 유명한 작품 중 대다수는 여성을 묘사한 것입니다.
발레 수업_에드가 드가
무용실_에드가 드가
# 프레데릭 바지유 Frédéric Bazille
출처: 위키피디아
프랑스 남부의 따스한 빛의 묘사가 두드러지는 화풍을 구사한 초기 인상주의 화가.
마네, 시슬리, 르누아르, 졸라 등 동시기 아방가르드 화가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고, 서로의 친분을 확인할 수 있는 인물화를 남겼습니다. 이 외에도 풍경화, 정물화, 누드화에도 일가견이 있던 다재다예한 예술가예요. 젊은 시절 어려운 처지의 모네와 르누아르를 많이 도와주기도 했어요.
프로이센 전쟁에서 전방 전투에 자원하며 29살의 나이로 전사하여, 1874년 본격적으로 시작된 인상주의의 만개를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_외젠 들라크루아
이도교와 싸우는 파샤_외젠 들라크루아
# 들라크루아의 추종자들
외젠 부댕, 트루빌 해변_오르세 미술관
출처: 위키피디아
파리에서 태어나 소년 시절을 항구 도시 ‘르 아브르’에서 지낸 모네는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어요. 10대 때부터 캐리커처나 초상화를 그려 용돈벌이를 했죠. 그러다 우연히 풍경화가 ‘외젠 부댕’을 만나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며 외광 묘사, 자연에서 시시각각 변하는 빛의 그림을 그리는 법을 배웠습니다. 또한 이 과정에서 네덜란드의 풍경화가 ‘요한 바르톨드 용킨트’를 알게 되었고, 그로부터 대기 중의 빛을 포착해 내는 기법을 익혔어요. 훗날 모네는 용킨트가 자신이 예술가의 눈을 키우도록 가르침을 베풀어준 진정한 거장이라 말하기도 했습니다.
자연을 그리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모네는 아버지의 반대를 꺾고 파리로 그림 유학을 가게 됩니다. 1662년 22살의 나이로 에콜 데 보자르의 샤를 글레이르 화실에서 그림을 배우면서 평생의 절친이 된 르누아르, 바지유, 시슬레를 만났어요. 가난한 재단사의 아들 르누아르는 생계를 위해 도자기에 그림을 그렸고, 영국 부유한 사업가 아들 시슬레는 가업을 물려받는 걸 포기하고 풍경화가가 되고 싶어 했습니다. 모네와 가장 친했던 바지유는 남프랑스 몽펠리에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부모님의 뜻에 따라 의사가 되기 위해 의학을 배우며 그림 공부를 했어요. 이들 모두 그 시대 새로운 그림을 추구하는 들라크루아의 추종자들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다른 예술가들 또한 친분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마네는 보들레르와 에드가 드가와 교류하기 시작했고, 서인도 제도 출신의 피사로는 세잔과 친분을 맺었습니다. 이렇게 훗날 인상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화가들이 삼삼오오 모여 교류를 시작했어요. 그러다 이들은 루브르나 카페 같은 곳에서 서로를 소개하며 안면을 익힙니다. 마네의 뮤즈 모리조도 이렇게 알게 된 사이예요.
들라크루아, 자화상
출처: 위키피디아
모네를 시작으로 르누아르와 바지유도 화실을 그만두고 나왔습니다. 이들이 퐁텐블로 숲에서 자연을 그리던 무렵, 마네는 낙선전에서 악명 높은 유명인이 되었죠. 이런 화가들을 힘들게 한 건 언제나, 늘, 돈 문제였어요. 집에서 보내주는 용돈으로 생활하는 모네는 늘 돈이 없었고, 바지유의 도움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바지유는 모네에게 자신이 새로 마련한 화실에서 함께 지내자고 제안하고, 그 둘은 함께 지내며 작품 활동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의 화실 바로 옆이 델라크루아의 화실이었어요. 화실 내부는 보이지 않았지만 정원은 내려다보였는데, 들라크루아가 모델을 초대해 정원에서 그림을 그릴 때면 모네와 바지유가 몰래 훔쳐보곤 했다고 해요. 이들이 들라크루아를 존경했던 이유 중 하나는 그의 작업방식이었습니다. 들라크루아는 모델을 한 자세로 두는게 아니라 자유롭게 행동하도록 두고 몇몇 스케치만 남겼고, 모델이 돌아간 후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순간적인 스케치로 필요한 모든 장면을 캐치한 것이죠.
바지유, 바지유의 아틀리에, 콩다민 거리 9번지, 파리_오르세 미술관
출처: 위키피디아
바지유, 모네, 르누아르는 바지유의 화실에서 함께 지내며 작품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다 모네가 결혼하며 먼저 나오고, 르누아르는 더 늦게까지 바지유의 도움을 받았어요. 위 그림은 세 사람이 함께 지낸 화실이 아닌, 바지유가 1870년 새로 구한 자신의 화실을 그린 그림입니다.
그림 속 공간은 그냥 보기에도 꽤 넓어 보이는데, 그러다 보니 당시 동료 화가들과 문인들의 모임 장소가 되었어요. 한가운데서 팔레트를 들고 그림을 설명하는 이는 바지유이고, 그의 곁에 모자를 쓴 마네와 모네가 그림을 감상하고 있습니다. 계단에는 르누아르가 소설가 에밀 졸라와 이야기하고 있으며, 음악가이자 화가이자 미술 수집가 에드몽 메트르가 오른쪽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어요. 에드몽 메트르는 인상파 화가들이 유명해지기 전부터 이들의 그림을 사들이며 후원했던 인물입니다.
# 사랑에 빠진 모네
모네, 카미유(초록 드레스의 여인)_브레멘 미술관(독일)
출처: 구글 아트 앤 컬쳐
여자 보는 눈이 높았던 모네가 사랑에 빠졌습니다.
르누아르와 바지유가 여자들과 어울릴 때 코웃음 치며 “난 귀부인 아니면 거들떠보지 않아!”라고 말했던 그가 가난한 집안 출신의 모델 ‘카미유 동시외’에게 빠지니 친구들은 놀리지 않을 수 없었어요.
카미유와 모네는 서로를 열렬히 사랑했는데, 이때 그린 그림이 <카미유(초록 드레스의 여인)>입니다. 모네는 이 그림을 무려 나흘 만에 그리고 살롱전에 출품했는데 대범한 필치와 카미유의 우아함 덕분에 높은 가격에 팔리며 모네의 이름을 알리는 성공을 거두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모네와 마네의 이름이 비슷해 많은 사람들이 둘을 혼동했는데, 그래서 일부는 마네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건 낙선한 마네에겐 기분 나쁜 일이었고, 그 둘의 사이가 잠시 틀어지기도 했어요. 자신의 유명세를 이용하기 위해 가명을 비슷하게 지었다고 생각했거든요. 어쨌든 오해는 풀렸고, 둘은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가 되었습니다.
모네, 정원의 여인들_오르세 미술관
출처: 위키피디아
카미유가 아이를 임신하며 모네의 고민이 시작되었어요. 온 집안이 이들의 결혼을 반대할 게 뻔했기 때문이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네는 카미유를 파리에 두고 고향으로 가서 가족들을 설득하지만 생각보다 더 큰 반발에 부딪힙니다. <생타드레스의 테라스>는 이때 고향에 간 모네가 가족들을 그린 그림이에요.
생타드레스의 테라스_클로드 모네
실의에 빠져 돌아와 어려움에 처한 모네를 바지유가 다시 한번 도와줍니다. 모네의 그림 <정원의 여인들>을 자신이 직접 사준 것인데요. 이 작품은 모네가 빚쟁이들에게 쫒기며 여기저기로 집을 옮겨다니던 시기에 그린 그림입니다. 당시 모네의 경제적 어려움은 심각했어요.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 파리에서 멀리 벗어났고, 먹을 것이 떨어져 밥을 굶는 날이 많았죠. 친구들에게 돈을 빌렸고, 르누아르는 부모님 집에서 밥을 싸와 이들을 먹이기도 했어요.
“내 그림은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걸까? 이젠 명성을 기대하는 것 따위도 포기해야 할 것 같아. 모든 것이 암담해. 난 여전히 빈털터리고, 오늘도 굶어야 하는 카미유와 장(아들)을 볼 때면 가슴이 미어져” 모네가 바지유에게 보낸 이 편지는 그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 보여줍니다.
# 거꾸로 가는 시간
바지유, 가족 모임_오르세 미술관
출처: 위키피디아
인상파 화가들이 처음부터 살롱전에서 배척당한 것은 아닙니다. 첫 낙선전이 열린 이후 몇 년간은 아카데미 화풍과 다른 새로운 그림들도 전시되었어요. 이때 바지유가 자기 가족들을 그린 <가족 모임>이 살롱전에 전시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분위기는 다시 옛날로 돌아갔어요. 살롱전의 책임자인 슈느비에르 후작과 에콜 데 보자르의 새로운 교수 부르고가 재야파 화가들이 살롱전을 통과하는 걸 적극적으로 막았기 때문이에요.
바지유는 게르부아 카페에서 연일 이를 털어놓으며 우리만의 전시회를 열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쿠르베와 마네가 연 개인전의 실패를 본 동료들은 선뜻 나서지 못했어요. 물론 대중들도 아직 새로운 미술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고요.
모네, 라 그르누이에르의 공원_메트로폴리탄 미술관(뉴욕)
출처: 위키피디아
이 기간에도 모네는 야외에서 그림 그리는 것에 매진했어요. 그는 스케치만 하고 돌아와 작업실에서 그림을 마무리하는 건 가짜이며, 같은 풍경이라도 빛의 세기와 각도에 따라 전혀 다른 그림이 되기 때문에 야외에서 완성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야외에서 완성하는 그림을 ‘외광 회화’라고 하는데, 이는 날씨영향을 많이 받을 뿐만 아니라 시시각각 변하는 빛 때문에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모네는 같은 장소에 캔버스를 여러 개 늘어놓고, 빛의 강도에 따라 캔버스를 옮겨 다니며 그림을 그렸습니다. 어떤 날은 무려 서른 개의 캔버스를 놓고 그렸다고 해요.
쿠르베가 모네를 찾아간 어느 날, 아무것도 그리지 않고 빈둥거리고 있는 모네를 보고 왜 그림을 그리지 않느냐 물었더니 모네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까부터 커다란 구름에 가려 해가 나오지 않아 그릴 수가 없습니다” “그럼 배경 같은 걸 그리고 있으면 되지 않나?” “안 됩니다. 색이 전혀 달라지잖아요” 쿠르베는 모네의 고집에 혀를 내둘렀어요.
# 마지막 살롱전
세잔, 사과 광주리가 있는 정물_시카고 미술연구소(시카고, 미국)
출처: 위키피디아
1870년 나폴레옹 3세 치하의 마지막 살롱전이 열렸습니다. 이때는 마네, 모리조, 바지유, 시슬레, 라 투르, 르누아르, 모네 등이 자기 작품을 전시할 수 있었어요. 이 중에서 살롱전에 통과하는 것보다 살롱 심사위원을 공격하고 싶었던 ‘폴 세잔’이 모두를 경악시켰습니다. 당연히 그는 낙선했지만 심사 기간 내내 화제의 중심이었어요. 세잔의 그림이 어찌나 대담하고 강렬했는지, 그의 그림을 보다 다른 화가의 그림을 보면 우아하고 아름다워 보였죠.
그러던 중 프로이센 전쟁이 일어납니다. 당시 강대국으로 급부상하던 프로이센은 독일을 통일하고자 했는데, 나폴레옹 3세가 이에 선전포고했어요. 이때 모네는 카미유와 정식 결혼을 하고 노르망디에서 신혼여행중 이었는데, 전쟁에 징집되면 가족들을 먹여 살릴 방법이 없었기에 아버지에게 돈을 빌려 가족들과 런던으로 몸을 피했습니다.
나폴레옹 3세는 선전포고 2개월 만에 항복하고 퇴위했습니다. 파리 시민들은 황제의 항복을 인정하지 않고 계속해서 저항했어요. 그렇게 밀려온 프로이센군에게 파리가 포위되었을 때, 마네와 드가, 르누아르는 파리 방위군으로서 총을 들고 싸웠습니다. 그리고 이때 전방 전투에 자원했던 29살의 바지유가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왔어요. 결국 파리에서의 저항도 무너지고 전쟁은 프로이센의 승리로 끝났어요. 이렇게 새로운 공화제 정부가 들어서며 왕정으로 돌아가려는 분위기가 고조되었고, 다시 혁명이 일어나 1871년 2월 파리 코뮌이 시작되었습니다. 수개월의 내전 끝에 파리 코뮌은 진압되었지만 수많은 사람이 학살당하고 추방당했어요. 쿠르베는 방돔 광장 기념물 파괴에 가담했다는 죄로 전재산을 몰수당하고 스위스로 망명 갔습니다.
바지유와 쿠르베를 제외한 다른 화가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어요. 모네는 아르장튀유에 집을 장만하고 집을 가꾸며 지냈고, 여러 화가들은 몽마르뜨 지역에 있는 피걀 광장으로 모임 장소를 옮겼습니다.
# 인상파의 시작
모네, 인상: 해돋이_마르모탕 모네 미술관(파리)
출처: 위키피디아
1873년 모네와 피사로를 중심으로 ‘무명 화가 및 조각가, 판화가 협회’를 창설하고 첫 전시회를 개최했습니다. 이 전시는 살롱전보다 보름 먼저 열었는데, 사람들이 낙선전이라 여길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에요. 드가, 모네, 모리조, 피사로, 르누아르, 시슬레, 세잔 등 30명에 이르는 화가와 165점의 작품이 걸린 나름 큰 규모의 전시회는 살롱전과 다르게 심사하는 사람도 없고 탈락도 없고, 그저 자신의 작품을 선보이는 자리였어요. 그렇지만 딱히 성과는 없었습니다. 손해를 본 건 아니지만 대부분의 그림은 싼 값에 팔렸고 남는 게 없었죠. 단 하나 얻은 것이 있다면 모네의 <인상: 해돋이>를 통해 이 화가들이 얻게 될 ‘인상주의’라는 표현이 이때 처음 사용되었다는 거예요.
이후 전시회는 일곱 번 더 열렸는데, 한 기자는 이들에 대해 ‘여자도 끼어있는 대여섯 명의 정신병자들의 작품 전시’라며 비웃기도 했습니다. 3회차까지 잘 이어지던 전시회는 드가의 독선으로 갈등이 피어나 모네, 르누아르, 시슬레 순서대로 불참하기 시작했고, 모리조, 피사로, 카유보트는 끝까지 유지하려 노력했어요. 이후에는 드가의 제자 매리 커셋과 고갱도 참여했습니다.
마를리 항의 홍수_알프레드 시슬레
압생트_에드가 드가
생 라자르 역_클로드 모네
# 카미유의 죽음과 성공의 시작
모네, 양산을 쓴 여인_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워싱턴, 미국)
출처: 위키피디아
강렬한 햇살 아래 아내이자 뮤즈였던 카미유와 아들 장을 그린 이 그림은 모네가 아르장튀유에 살던 시절 그린 그림으로, 그가 아내와 함께 얼마나 행복한 나날을 보냈는지 보여줍니다.
이 무렵엔 일부 수집가들과 화상들이 적극적으로 그의 그림을 구매하며 전보다 여유있는 살림이 되었는데, 이때 적극적인 도움을 준 수집가 중에는 에르네스 오슈데가 있었어요. 하지만 오래지 않아 불경기가 시작되고 사업을 하던 오슈데가 큰 빚을 지고 쫓기는 신세가 됩니다. 모네와 카미유는 그동안 받았던 은혜를 갚고자 자신들의 집에 이들이 들어와 살도록 했어요.
그 무렵 카미유는 병에 걸려있었고, 모네 집에 얹혀 살게 된 오슈데의 아내 알리스는 교양도 있고 적극적인 성격을 가진 여자였어요. 그녀는 아픈 카미유를 정성껏 보살피고 아이들도 돌봐주었죠. 카미유는 이런 알리스에게 고마우면서도 남편과 알리스가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는 게 신경 쓰였고, 그래서인지 몸이 조금 나아졌을 때 아이를 가졌는데 그러면서 카미유의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졌습니다. 그렇게 카미유는 서른두살의 젊은 나이에 남편과 두 아이를 두고 세상을 떠났어요. <임종을 맞은 카미유>는 모네가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그린 작품입니다.
임종을 맞은 카미유_클로드 모네
모네, 라바쿠르의 센 강_댈러스 미술관(텍사스, 미국)
카미유가 죽자 모네와 알리스의 동거는 스캔들이 되었습니다. 모두가 이 둘이 이미 깊은 관계였을 거라 생각했죠. 모네는 많은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소신을 포기하고 그림을 많이 파는 데만 집중했습니다.
이때 부드럽고 우아한 풍경화 <리바쿠르의 센 강>으로 살롱전에 입선하며 호평을 받았지만 그건 곧 동료 화가들을 배신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이후 경제적 형편이 나아진 모네는 파리에서 멀지 않은 푸아시로 이사했는데, 같은 시기 파리에서 사업 재기를 위해 고군분투하던 알리스 남편이 여러 번 파리로 오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알리스는 모네 곁에 남았어요. 그 뒤 알리스 남편의 재기가 어려워지자 모네는 알리스의 아이들을 모두 자신의 아이들로 들였고, 알리스의 남편이 죽은 후 둘은 결혼했습니다.
그 후 모네는 지베르니에 정착하고, 노르망디와 대서양 연안을 다니며 많은 바다 그림을 그렸어요. 이때 그린 건초더미 연작과 루앙 대성당 연작은 지금까지도 인상주의 최고 걸작이자 모네의 걸작으로 평가받죠. 이전까지는 취미 삼아 조금씩 정원을 가꾸던 모네는 1890년쯤부터 본격적으로 정원을 꾸몄고, 연못을 만들어 ‘물의 정원’이라 칭했습니다. 집 떠나 있는 걸 싫어하는 알리스를 위해 집에 머물며 하던 소일거리가 이제 모네 삶에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어요. 모네의 정원은 점점 알려졌고, 많은 사람들이 정원을 보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1911년부터 모네는 여행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정원만 그렸어요. 시시각각 변하는 수면과 연꽃을 화폭에 담아냈죠.
모네, 수련_오랑주리 미술관
출처: 워너고트립
평생 직사광선 아래 그림을 그린 모네는 시력이 극히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두 번째 아내 알리스도 세상을 뜨고, 카미유와의 큰아들 장도 젊은 나이에 병을 얻어 눈을 감았어요. 큰 상실감과 고통 속에 그는 자신의 정원을 계속해서 그렸고, 제 1차 세계대전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수련 연작> 두 점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이 그림 두 점을 국가에 기증하려 했는데, 모네의 친구이자 당시 총리였던 클레망소가 이 프로젝트를 확대해 총 8개의 대작을 요청해요. 그렇게 길이 100m에 달하는 거대한 연작이 탄생합니다.
백내장으로 인한 시력 저하로 예전만큼 감각적이고 강렬한 빛을 그려내진 못했지만, 모네의 수련 연작은 우리에게 더 큰 감동을 불러일으켜요. 현재 오랑주리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 시대의 변화
쇠라, 그랑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_시카고 미술 연구소(미국)
출처: 위키피디아
제 8회 전시회는 실패로 돌아갔고, 그나마 남아있던 모리조, 피사로, 카유보트, 커셋 등도 한계를 인정하고 각자의 길을 가기로 합니다. 마지막이었던 전시회에서 조르주 쇠라와 시냐크가 점묘화로 갈채를 받았고, 화상 뒤랑 뤼엘이 미국에서 대형 전시회를 열며 인상파 그림이 미국에 알려지기 시작했어요. 이후 미국 부호들이 그 가치를 알아보며 파리에서 그림을 매입하기 시작했고, 그걸 본 파리 여론도 인상주의에 대한 평가를 달리하게 되었죠.
모네는 대중의 기호에 입맛을 맞추었다가 다시 인상주의로 돌아오며 가장 먼저 성공했고, 이탈리아를 다녀온 후 색이 아닌 선이 강조된 누드화 위주로 그림 스타일을 바꾼 르누아르가 그 뒤를 이었습니다. 이들의 명성은 미국을 비롯해 전 유럽으로 퍼져갔어요. 가장 나이가 많았던 피사로는 서서히 그림 값이 오르며 생계 압박에서 여유를 찾았다가 1903년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시슬레는 오랫동안 이어진 궁핍한 생활에 심리적으로 많이 불안정했는데 1899년 사망한 이후 일년도 채 되지 않아 그의 그림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높은 가격에 거래되기 시작했습니다. 성공을 앞두고 생을 마감한 그의 삶에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했어요. 부유한 은행가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동생의 빚을 갚느라 빈털터리가 된 드가는 생계를 위해 그림을 그려야 했는데, 발레리나 시리즈가 사랑받으며 1880년대부터 거장 타이틀을 달았습니다.
인상파 화가들 중에서 부유한 편이던 카유보트는 동료들을 돕기 위해 그들의 그림을 사주었기 때문에 초기작에 해당하는 귀한 작품들을 많이 갖고 있었는데, 1894년 생을 마감하며 이 컬렉션을 루브르박물관에 기증한다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근데 당시 에콜 데 보자르의 입김이 쎗던 루브르에서 모네나 르누아르에 대해서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지만 세잔 등과 같은 아직 생소한 화가들의 작품에는 거절 의사를 밝히며 작품을 선별했고, 카유보트의 유언은 부분적으로만 실현되어 많은 논란이 되기도 했어요. 마네의 아내 수잔은 돈이 필요해 <올랭피아>를 미국에 팔려고 했었는데, 모네와 동료들이 주축이 되어 돈을 모아 <올랭피아>를 구매하고 루브르박물관에 기증했어요. 덕분에 마네 최고의 화제작이 파리에 남을 수 있었죠.
또한 모네는 당시 최고의 조각가였던 로댕과 회화와 조각이 함께하는 2인전을 열기도 했으며, 이 둘은 자신들의 모든 작품을 국가에 기증하기로 합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기증 전에 모네가 소장 중인 그림을 한 점이라도 더 구매하려는 경쟁이 펼쳐졌고 그 덕분에 모네의 그림 값은 하늘을 치솟게 올랐어요. 그렇게 모네는 인생 말년에 큰 성공을 하고 1926년 83세 나이에 지베르니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면의 세계
후기 인상주의의 대표주자,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 네덜란드 작은 마을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반 고흐는 지금은 엄청난 명성을 가졌지만 어렸을 때부터 그림에 특별한 재능이 있거나 흥미가 있었던 건 아니에요. 기숙학교를 다니다 가난으로 그만두고 숙부가 운영하던 구필화랑에서 판화를 복제하고 판매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 신비주의에 빠지며 신학 대학에 들어가게 되죠. 하지만 그의 광신도적인 기질과 격정적인 성격 때문에 전도사의 길을 접고 그림을 선택합니다. 늦은 나이에 그림을 시작한 고흐는 동생 테오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그의 그림을 통해 어설프고 순진하고 힘들었던 그의 일생을, 그의 글을 통해 깊이 있는 생각들과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자신의 그림이 언젠가 인정받을 거라는 믿음을 잃지 않았던 그는 자신이 가장 위대한 미술 역사가 된 걸 알고 있을까요?
#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고흐, 자화상_시카고 미술 연구소(미국)
출처: 위키피디아
비극적일 정도로 짧은 생애였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미술가.
네덜란드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주로 활동한 후기 인상주의 화가입니다. 모든 사랑에 실패하고, 생전에 단 한 점의 그림만 팔리는 등 힘든 일생을 보냈어요. 초기 네덜란드 시절에는 어두운 색조의 그림을, 후기에는 파리에서 생활하며 인상파, 신인상파의 영향을 받아 자신만의 화풍을 전개했어요.
자신의 귀를 자르며 아를의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가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서 권총으로 자살했으며, 그가 동생 테오 및 기타사람에게 보낸 방대한 양의 편지는 서간문학으로서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해바라기_반 고흐
밤의 카페 테라스_반 고흐
# 폴 고갱 Paul Gauguin
출처: 위키피디아
고흐와 더불어 프랑스의 후기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고흐와 함께 아를에서 지내기도 했으며, 문명세계에 대한 혐오감으로 남태평양의 타히티섬으로 떠난 이후 원주민의 건강한 인간성과 열대의 밝고 강렬한 색채가 그의 예술을 완성시켰습니다. 그의 상징성과 내면성, 그리고 비자연주의적 경향은 20세기 회화가 출현하는 데 근원적인 역할을 했어요.
타히티의 여인들_폴 고갱
황색의 그리스도_폴 고갱
# 폴 세잔
출처: 위키피디아
인상주의로 출발해 새로운 그림으로 이후 미술에 영향을 미친 후기 인상주의 화가로, 인상주의와 플랑드르 미술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세잔의 정물화 가운데 가장 알려진 작품인 <사과와 오렌지>는 무미건조한 주제를 위대한 미술로 끌어올렸다고 평가받아요. 말년에는 <목욕하는 사람들>처럼 몽환적으로 채색된 누드화 습작을 주로 그렸습니다.
사과와 오렌지_폴 세잔
목욕하는 사람들_폴 세잔
# 몽마르뜨
출처: 구글
술집과 카바레로 파리 최대 유흥가로 알려진 몽마르뜨의 르픽 가 54번지. 평범한 건물로 보이는 파란 문의 아파트 앞은 늘 사람들이 모여있습니다. 이 건물의 3층은 1886년부터 1888년까지 동생 테오와 반 고흐가 살던 집으로 여전히 주거지로 사용되는 건물이라 안에 들어갈 수는 없어요. 그럼에도 고흐의 흔적을 찾는 팬들의 발걸음은 끊이지 않아요.
출처: 핀터레스트
고흐는 이곳 몽마르뜨에서 지내며 여러 화가들과 어울리고 작품 활동을 했습니다. 당시 고흐는 매주 주말 자신의 그림을 들고 로트레크의 파티에 찾았다고 해요. 이들은 고흐에게 많은 영감을 받았고, 고흐는 파리의 밤문화를 배웠고, 그곳은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는 장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새로운 그림들을 접하며 이전의 어두운 화풍을 버리고, 밝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노동자나 농민, 가난한 이들을 그리던 그림에서 사회적 메세지도 사라졌어요.
이런 몽마르뜨에는 모두가 이름 한 번쯤은 들어봤을 예술가들과 관련된 장소들이 몇 곳 있어요. 사진 속 붉은색 카페 ‘르 꽁쉴라’는 모네와 피카소, 반 고흐 등 예술가들이 즐겨가던 장소로, 특히 고흐가 주로 이곳에서 식사를 해결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 첫 발걸음
1886년 2월 고흐는 화가가 되겠다는 결심 하나로 파리에 옵니다. 아, 이번이 첫 파리행은 아니었고, 20대 초반 파리에서 화랑 점원으로 일한 적이 있었어요. 동생 테오는 화상일에 상당한 재능이 있었지만 고흐는 아니었고, 연이은 사랑 실패와 정서적 혼란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다 미술에 전념하기 위해 다시 파리행을 선택한 거죠.
에밀 졸라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당시 파리에는 살롱전과 인상주의 마지막 전시회, 인상주의 전시회에 불참한 모네와 르누아르가 참여한 ‘국제전’이 열리고 있었어요. <그랑드 자트르 섬의 오후>를 그린 쇠라가 주목받고 있었으며, 같은 해 프랑스 소설가 에밀 졸라가 루공 집안과 마카르 집안의 후손들을 중심으로 제2제정기의 프랑스 사회를 묘사한 <루공 마카르 총서>를 발표했어요. 소설 마니아였던 고흐도 졸라를 존경하고 있었죠.
에밀 졸라는 평론가로 활동하기도 했는데, 들라쿠르나와 쿠르베, 마네가 비판받을 때 이들의 편에 서서 변호해 준 인상주의 진영의 몇 안되는 투사였습니다. 신작 소설 <걸작>에서 자신의 친구인 세잔이 명백히 실패했다고 단정하고 글을 쓰는 바람에 졸라와 세잔의 30년 우정이 끝나버렸지만요.
# 바르비종파 미술
밀레, 만종_오르세미술관
파리에 오기 전 화상 일을 했던 고흐는 세계 미술의 흐름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지만 그런 고흐에게도 인상주의 그림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고흐는 밀레의 그림과 코로 등 바르비종파의 그림도 좋아했어요. 그래서 그의 초기 작품에는 밀레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습니다. 지금은 세계적인 화가로 이름을 날렸지만 고흐는 화가로서 기초는 전혀 없었습니다. 아카데미 몇 곳에 등록한 적은 있어도 제대로 이수한 적은 없었어요. 그래도 끈기 있게 노력했습니다.
# 고흐의 친구들
시냑, 생 트로페의 항구_국립서양미술관(도쿄)
출처: 위키피디아
서른셋의 고흐와 서른여덟의 고갱은 많이 달랐지만 잘 어울렸어요. 늘 냉철하고 확신에 차 있던 고갱은 인상주의 모임인 누벨 아텐 카페를 자주 드나들며 고흐도 자주 데려갔습니다. 처음 고흐는 인상주의 화가들을 선망했지만 점차 실망하게 됩니다. 서로 생각도 전혀 달랐고 유대감도 없었어요. 그러다 새롭게 친해진 ‘폴 시냑’과 작품활동을 하게 되요. 당시 인상주의 이후 그림을 고민하던 화가 동료들로는 로트레크, 베르나르, 고갱, 시냐크, 루이 앙크탱 등이 있었습니다.
극심한 불경기가 찾아오고 열정도 고갈된 고흐는 독한 술을 즐기기 시작했어요. 그런 그에게 고갱이 베르나르가 있는 브르타뉴의 퐁타벤으로 떠나자고 했을 때 고흐는 잠시라도 따뜻한 곳에서 지내고 싶다 했습니다. 그래서 아를에 갔다가 당시 세잔과 몽티셀리라는 화가가 있던 프로방스로 넘어갈 계획을 세웠죠. 알퐁스 도데의 소설 <아를의 여인>을 즐겨 읽던 고흐가 이 책의 배경지인 아를을 동경했거든요. 테오도 형을 지지했는데, 점점 자신을 힘들게 하는 형과 함께 지내는 것 보다 돈이 더 들더라도 떨어져 사는 게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 귀를 자르다
고흐, 노란 집_반 고흐 뮤지엄(암스테르담, 네덜란드) / 고흐와 고갱이 함께 살던 집
출처: 위키피디아
1882년 2월, 고흐가 아를에 도착했습니다. 고갱과 베르나르를 비롯해 어려움을 겪는 동료들과 함께 이곳에서 작업할 생각에 들뜬 마음으로요. <밤의 카페 테라스>, <밤의 카페> 등 걸작들은 모두 이 시기 아를에서 그린 그림이에요. 고흐는 테오에게 고갱에게서 작품을 받는 조건으로 생활비를 제공하라 조릅니다. 실제로 테오도 그의 가능성을 높게 봤기 때문에 나쁘지 않은 거래였어요. 당시 고갱은 빚도 많고 경제적으로 절망적인 데다 아를에 별로 가고 싶지도 않았지만 테오의 제안 이외에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어요. 고흐는 고갱이 온다는 소식에 신나서 역 주변 작은 집을 빌려 온통 노란 색으로 꾸미고, 고갱의 방을 해바라기 그림으로 장식했어요.
밤의 카페_반 고흐
밤의 카페 테라스_반 고흐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_반 고흐
그렇게 둘은 함께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둘은 너무나 달랐어요. 고갱은 화가이기 전에 주식중개인이었고, 깔끔하게 생활하는 편이었습니다. 반면 고흐는 정리 정돈이나 청소와는 거리가 멀었죠. 결국 며칠 후 고갱은 두 사람의 할 일 목록을 만들고 역할을 분담합니다. 둘은 성격도 아주 달랐어요. 그림에 대한 신념을 바탕으로 세속적인 성공을 추구한 고갱은 조금 차갑고 거만한 성격이었습니다. 공감 능력도 딱히 좋은 편은 아니었어요. 반면 고흐는 그림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이상주의자였고, 자신이 바라는 것에 집착하는 편이었죠. 여러명이 함께 토론할 때는 그 차이를 크게 느끼지 못했는데, 둘만의 대화가 이어지며 갈등의 꽃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둘의 대화는 점점 줄고, 사이가 틀어지며 고흐는 고갱이 떠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점점 더 불안정해갔어요. 그러던 어느 날 해바라기를 그리던 고흐의 모습을 고갱이 그렸는데, 그 초상화를 보고 고흐는 뭔가 미친놈을 그린 것 같다며 기분 나빠했고, 그날 술집에 가서 말싸움합니다.
고갱의 회상에 따르면 그날 고흐가 면도칼을 들고 자신을 위협해서 자신은 고흐가 제풀에 지칠 때까지 노려볼 수밖에 없었고, 집에 들어갈 수 없어 다른 곳에서 묵었다고 해요. 그리고 그날 밤 고흐는 자신의 왼쪽 귀를 잘랐습니다. 그러고는 어느 창녀에게 가서 선물이라고 귀를 던져주고 집에 돌아와 쓰러져 잠이 들었어요. 여자의 신고를 받고 경찰이 들이닥쳤고, 고갱이 테오에게 급히 전보를 쳐 테오가 왔습니다. 그리고 치료가 끝나고 별문제 없을 거란 진단을 받자 테오와 고갱이 파리로 떠났어요.
그런데 고흐가 칼을 들고 위협했다는 건 오직 고갱이 남긴 <회상록>에 의존한 이야기에요. 처음 고갱이 이 사건을 주변인들에게 말할 때는 면도칼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고 해요. 그래서 많은 고흐 연구자들은 <회상록>의 내용이 사실이 아니며, 죄책감에 의한 기억 왜곡일 것이라 주장합니다.
그 뒤로 고흐는 정신과 치료를 받고 생 레미에 있는 정신병원에 입원했습니다. 그곳에서도 열심히 그림을 그렸어요. 그리고 고갱에게 계속해서 편지를 보냈지만 고갱은 고흐를 찾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먼 훗날 고갱은 이 시기를 돌아보며 그때 서로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매우 뜻깊은 시간이었다고 말했습니다.
# 별이 빛나는 밤
고흐, 별이 빛나는 밤_뉴욕 현대미술관
귀를 자른 사건 발생 후 고흐는 동네에서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습니다. 본인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는 ‘위험한 사람’이 되었고 아를에서 30분 정도 거리 생 레미의 정신병원에 입원했어요. 병원에서의 생활은 아주 제한적이었지만 계속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때부터 그의 그림은 ‘춤추는 붓’이라 표현할 정도로 힘차게 바뀌어요. 그 대표적 예로 <별이 빛나는 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를 보고 “고흐의 광기가 빚어낸 그림”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그림의 배경은 어디인지 확실하지 않아요. 고흐는 멀리 갈 수 없는 상태였고 병원 근처에는 이런 풍경을 가진 곳이 없거든요. 고흐의 아픔이 담긴 이 걸작은 상상화를 그린 것인지 어딘가에서 스케치만 하고 돌아와 임의로 풍경을 그린 것인지 아직 미궁 속에 남아있습니다.
# 오베르 쉬르 우아즈
고흐, 폴 가셰 박사_오르세 미술관
출처: 위키피디아
아를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던 고흐는 북쪽으로 가게 해달라고 테오에게 편지를 씁니다. 테오는 여기저기 알아보다가 피사로의 도움을 받아 오베르에 있는 의사 ‘가셰 박사’를 알게 돼요. 5월 17일 파리에 잠시 머물며 조카와 친구들을 만나고 사흘 후 가셰 박사를 만나기 위해 오베르로 떠났습니다. 가셰 박사는 아마추어 화가이자 우울증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였는데, 고흐의 그림을 아주 좋아했어요. 고흐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부탁하기도 했죠.
오베르에서 고흐는 다시 활기를 되찾으며 하루에 한 작품씩 그려냈어요. 처음엔 가셰 박사 집 주변만 그리다 점점 마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그렸습니다. 가셰 박사도 고흐가 곧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할 거라 기대했어요.
고흐, 까마귀가 나는 밀밭_반 고흐 미술관(네덜란드)
그 시기 테오의 상황은 좋지 않았습니다. 상사는 테오가 인상주의 그림만 모으는 것에 불만이 있었고 그걸로 큰 스트레스를 줘서 회사를 그만둘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가족 생활비에 형의 치료비까지 부담하는 테오에게 모아둔 돈은 없었어요. 7월 6일, 고흐와 테오가 심하게 다투었습니다. 테오의 아이가 오랫동안 아팠었는데 조금 나아졌다는 말을 듣고 고흐가 집에 들이닥쳤어요. 집은 손님을 맞을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인 상태였고, 고흐는 자기 작품들이 엉망으로 걸려있고 보관 상태가 나쁜 것에 대해 기분이 나빠졌어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고흐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들이 몰려왔습니다. 모두가 떠나고 서로 화가 난 형제는 언성이 높아졌고, 생활비 이야기도 나왔어요. 고흐는 그동안 자기를 위해 희생한 동생이 어려움에 처했는데 자신은 짐만 되었다는 걸 알고 오베르로 도망쳤습니다. 테오는 그 뒤로도 계속 형을 도와줬어요.
머지않아 가셰 박사와 고흐의 관계가 끝나게 됩니다. 테오와의 일로 심리가 불안해진 고흐가 가셰 박사에게 화를 내게 된 거예요. 이렇게 파리에서 돌아온 고흐는 자신의 슬픔과 지독한 외로움을 담아 <까마귀가 나는 밀밭>을 그렸습니다.
고흐,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교회_오르세 미술관
출처: 위키피디아
7월 27일, 점심을 먹은 고흐는 여느때 처럼 그림을 그리기 위해 밖으로 나갔어요. 그리고 머물던 여관 근처 밀밭에 가서 왼쪽 가슴에 항상 지니고 다니던 권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총알은 심장을 벗어났고 척추 앞에서 멈췄습니다. 고흐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해가 질 무렵이었고 권총을 찾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고흐의 상태에 모두가 놀랐고 의사와 가셰 박사도 왔습니다. 다음날 경찰이 왔고 테오도 모든 일을 뒤로하고 달려왔습니다.
두 형제는 오랫동안 네덜란드 말로 대화를 나누다 새벽 1시 고흐가 죽었습니다. 37살의 젊은 나이였어요. 형의 죽음 이후 슬픔에 빠진 테오도 정신 착란이 생겼습니다. 그는 네덜란드로 돌아가 정신병원에 들어갔는데 그간 건강이 좋지 않았던데다 합병증이 일어나 형이 죽은 지 6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 원시적인 삶
쇠라, 서커스_오르세 미술관
출처: 위키피디아
고흐가 죽은 후 몇 달 만에 쇠라도 그 뒤를 이었습니다. 쇠라는 광학과 색의 원리에 몰두해 잘게 쪼갠 원색을 콕콕 찍어 그림, 점묘화를 그렸어요. 원근법적인 공간과 전통적인 구성까지 중시해 인상주의가 소홀히 여긴 부분까지 놓치지 않고 작업했죠. 마지막 작품 <서커스>는 서커스 현장의 역동성을 담아내고, 인물들의 모습과 표정을 의도적으로 과장되고 기괴하게 그린 그림입니다. 쇠라가 죽은 후 분할주의라고도 불리는 점묘화는 시냑이 대표하게 됩니다.
고갱,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_보스턴 미술관(미국)
출처: 위키피디아
고갱은 아를을 떠난 이후 퐁타벤에서 작품 활동을 하다가 점점 사람이 많아지자 더 한적한 곳을 찾아 옮겨갔어요. 고흐와 테오가 죽자 상황은 점점 더 나빠졌죠. 도시 문명과 부르주아 문화에 환멸을 느낀 고갱은 먼 이국땅에 대한 동경심을 가지고 타히티로 갑니다. 당장 생계는 초상화로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이었지만 현지 사람들에게 고갱은 그닥 매력있는 화가가 아니었어요. 일도 잘 안풀리고 식민지의 부조리한 현실도 고갱을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타이에라라는 곳에 가서 원시적인 삶을 찾았어요. 그곳에서 테하마나라는 소녀와 함께 살며 그림을 그렸습니다. 어느 정도 그림을 그린 후 다시 프랑스 마르세유에 돌아가 작업실을 구했습니다. 드가의 강력한 추천으로 화상 뤼엘이 고갱의 개인전을 열었는데 신진 화가들은 열광했지만 대부분은 싸늘한 반응이었어요. 이후 파리 몽파르나스에 작업실을 구한 고갱을 보고 사람들은 ‘고귀한 야만인’이라 불렀습니다. 고개은 일부러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자 괴상한 차림으로 다니고, 어린 외국 소녀를 애인이라며 데리고 다녔는데 그런 모습에 사람들은 더욱 혀를 내둘렀어요.
1895년 고갱은 다시 빈털터리가 되어 타히티로 떠났습니다. 타히티 무속신앙을 공부하고 조각에도 매진했어요. 이 시기에 어린 시절부터 노년기까지 인간의 일생을 나눈 것과 인생의 의미에 대한 명상의 테마, 이성과 자연의 대비를 표현한 고갱의 대표작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를 그렸습니다. 유언이나 마찬가지인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그가 추구한 예술과 세계관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고갱은 그곳에서 원주민과 만나 아이들을 나았어요. 선교사들과 식민지 정책이 원주민을 교화하는 데 분노한 그는 종교의 위선과 식민정책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원주민들과는 친구가 되었지만 그곳 지배층들에겐 낙인찍혔죠. 고갱은 마지막 순간까지 작품에 매진하며 걸작들을 그려냈어요. 1903년 심장 마비로 사망했습니다.
# 그 뒷 이야기
세잔, 생 빅투아르 산_오르세 미술관
출처: 위키피디아
1910년과 1912년, 영국 화가이자 예술비평가 로저 프라이가 런던에서 ‘마네와 후기 인상파전’이라는 전시를 열며 영국인들에게 세잔과 고갱, 고흐를 알립니다. 전시회는 두 번 모두 큰 성공을 거두었고 세 화가의 명성은 영국을 넘어 전 세계로 퍼졌어요. 세잔은 인상주의보다 더 구조적으로 단단하고, 더 오래 지속되는 그림을 추구하며 자연의 모든 사물을 기하학적인 형태로 해석한 독특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런 세잔의 실험 정신은 살롱전을 비롯한 보수적인 화단에서는 기피했지만 동시에 그 명성은 이미 확고했었죠.
가장 늦게 성공한 인상주의 화가이지만 인상주의와는 다른 그림이에요. 프라이가 전시회 이름에 ‘후기 인상주의’라는 말을 쓰면서 세잔도 고갱, 고흐와 더불어 후기 인상주의 화가로 남게 되었습니다. 세잔은 이후 입체파의 피카소나 야수파의 앙리 마티스에게 큰 영향을 미쳐 현대 미술의 시조로 불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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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 이후 서양미술은 현대미술로 접어듭니다. 근대미술의 마지막을 장식한 고흐의 주요 작품들은 파리 오르세 미술관과 그의 고향인 네덜란드의 반 고흐 미술관에서 주로 만나볼 수 있으며, 이외에도 런던, 뉴욕, 워싱턴 등 세계 곳곳에 고흐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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