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도시, 혁명의 도시, 빛의 도시, 패션과 낭만의 도시”
그 밖에도 많은 수식어가 있지만 파리를 말할 때는 그저 ‘파리’라는 이름 하나로 부족함이 없어요.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이 있듯, 파리도 지금의 이미지를 갖기까지 오랜 역사를 필요로 했습니다. 전 유럽 왕실이 선망하는 도시에서 대혁명을 거쳐, 나폴레옹의 영광과 몰락의 신화를 써 내려가며 지금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알고 보면 더 재미있는 프랑스의 예술 이야기 속으로 들어갈 준비 되었나요?
로마가 되고 싶었던 파리
파리는 중세 시대 고딕 예술의 중심지로 손꼽히는 도시였습니다. 하지만 르네상스가 되며 이탈리아에 그 영광을 빼앗기고, 예술의 변방으로 전락하고 말았죠. 그런 파리가 르네상스를 받아들이기도 전에 로마가 바로크 예술과 함께 세계 예술의 중심에 올라버렸어요. 내전을 수습하고 파리를 중심으로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를 만들어가던 프랑스는 그제야 예술 분야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합니다.
파리가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는 인상주의의 혁명이라고도 불리는 ‘벨 에포크’입니다. 베르사유 궁전이 지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위대한 로마를 따라잡기 위해, 적의 본거지인 로마에 아카데미를 설립한 것이 그 첫 번째 단추였죠. 선발된 영재들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고, 그 결과 로마에서 인정받는 화가가 되어 파리로 돌아와 제자들을 가르치며 파리 미술계는 로마에 버금가는 수준급 화가들을 양성하게 됩니다.
# 루이 14세 Louis XIV
출처: 위키피디아
“짐이 곧 국가다”
프랑스의 가장 화려한 절대왕정 시기를 지배한 왕.
태어나자마자 ‘신의 선물’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다섯 살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프롱드 난으로 정치적 위기를 겪고 트라우마가 생겨 파리 외곽의 궁을 전전하며 지내기도 했지만 이내 중앙집권을 강화했어요.
섭정 대신 마자렝 사망 이후 왜곡된 재정 체제를 개혁하기 위해 부정 축재의 증거가 명백했던 푸케를 대역죄까지 뒤집어씌워 감옥에 보내고, 궁정문화의 정점을 찍은 베르사유 궁전을 지었습니다.
“나를 닮지 말거라. 화려한 건축물에 마음을 쏟지도 말고, 전쟁을 좋아하지도 말아라. 이웃 나라와 싸우기보다 화친하도록 애쓰거라. 늘 신을 경건히 섬기고, 백성들이 신을 편안히 섬길 수 있게 돕거라.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군주가 되어야 한다.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단다.” - 인류 역사상 가장 화려한 생활을 한 군주가, 빛나는 성공을 거둔 젊은 날을 뒤로하고 마지막 순간 다섯 살의 증손자에게 왕위를 물려주며 남긴 말입니다.
# 니콜라 푸생 Nicolas Poussin
출처: 위키피디아
“난 감탄하는 그림을 그리지 않습니다. 내 그림 앞에서 누군가 생각에 잠겨 내면과 깊은 대화를 나누는 것, 그것이 내 그림에 줄 수 있는 가장 큰 찬사입니다.”
프랑스 회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로, 가난했지만 라파엘로에게 그림을 배우려는 열망 하나로 로마에 가서 프랑스 최초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화가입니다. 바로크 전성시대에도 묵묵히 고전주의 미술을 추구하며 신화화, 역사화, 풍경화 등에서 수많은 걸작을 남겼어요. 르브룅의 스승으로 고전주의를 확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철학자 화가’라고 불릴 정도로 방대한 지식과 삶에 대한 통찰로 많은 이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권력에서 멀리 떨어지려 노력하며, 자신이 추구하는 그림을 위해 왕을 포함한 누구의 간섭도 거부했어요.
# 샤를 르브룅 Charles Le Brun
출처: 위키피디아
루이 14세가 총애한 화가이자 실내 장식가로, 아카데미 예술의 기틀을 확립해 파리가 예술 분야에서 후진성을 벗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일찍부터 재능을 인정받아 로마로 유학을 가서 푸생에게 그림을 배운 그는, 스승 푸생을 롤 모델로 삼으며 모든 면을 따랐습니다. 단 하나 다른 점은 르브룅은 권력자를 위한 그림을 그렸다는 것인데, 어떠한 지시가 있었다기보단 ‘고객을 먼저 생각하는 화가’였던 것이죠. 가장 유명한 일화로는 거울의 방 천장화를 루이 14세를 신화화하며 신화의 주인공으로 그려낸 것이 있습니다.
바빌론에 입성하는 알렉산더_르브룅
다리우스의 가족을 만나는 알렉산더_르브룅
# 베르사유 궁전
세상에 없는 거대하고 화려한 궁전을 원했던 루이 14세는 푸케의 저택을 지었던 건축가 루이 르 보, 조경가 앙드레 르 노트르, 그리고 화가 샤를 르브룅을 불러와 베르사유 궁전을 짓기 시작했어요. 보 르 비콩트 성에서 ‘왕의 방’을 본 후 그의 뛰어난 역량을 알게 된 루이 14세는 르브룅을 궁정 수석 화가로 삼고 중요한 일을 모두 그에게 맡겼죠. 그 역시 공사를 진행하며 늘 왕의 기대치를 뛰어넘는 기획과 발상으로 신임을 얻었습니다. 그는 왕립 회화 및 조각 아카데미의 책임자로 임명되고, 망사르가 설계한 베르사유 궁전의 하이라이트인 ‘거울의 방’을 직접 기획하고 만들었어요. 이 방에는 루이 14세의 대표 업적을 담은 그림과 조각들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습니다.
궁전만큼 아름답기로 유명한 정원 역시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를 자랑하는데, 이 정원을 만든 프랑스식 정원의 창시자이자 완성자 르 노트르는 이탈리아 유학에서 돌아와 이탈리아와는 달리 넓은 숲과 평지로 이루어진 프랑스에 적합한 조경을 완성했어요. 궁전 뒤에 있는 정원을 신의 세계로 규정하고, 태양의 신 아폴론의 조각이 있는 연못을 중심으로 전체 모양을 구성했는데, 여기서 루이 14세가 곧 아폴론입니다.
이런 베르사유 궁전을 푸생과 르브룅을 알지 못하고 둘러보는 건 단팥빵에서 단팥을 빼고 먹는 것과 마찬가지일 정도로 위대한 두 화가의 작품을 베르사유 궁전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사전 지식 없이 둘러보면 그저 왕이 살던 유명하고 화려한 궁전일 뿐이지만, 조금만 알고 둘러본다면 베르사유는 역사의 한 시대가 고스란히 담긴 박물관이 될 수 있어요.
# 아카데미 예술
아카데미 예술이란 중세부터 이어온 개인 공방과 길드 중심에서 벗어나, 국가의 체계적인 지원으로 성장한 뛰어난 엘리트들이 이끌어가는 파리 예술입니다.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르브룅은 파리 예술을 로마만큼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걸 목표로 정했습니다. 하지만 르브룅이 아카데미를 만드는 과정에서 중세부터 기득권을 독점한 길드의 조직적인 저항을 대항하기는 어려웠어요. 장인들이 지배한 길드는 ‘예술=수공업’이라 여기는 마인드가 강했기 때문이에요. 그럼에도 그는 “이제 기능공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모두 예술가가 되어야 한다”는 스승의 비전을 밀어붙여 방대한 고전들을 아카데미의 필독서로 정하고, 그림의 기초로 데셍을 오래 연마하게 하는 커리큘럼부터 그림 주제 선정 방식, 구성, 색채 사용 등 모든 면에서 푸생을 본보기로 삼았어요.
그리고 르브룅은 ‘그림 실력 외에도 스승님처럼 지성과 학식을 갖춘 예술가들을 길러낼 것이다’라는 목표를 가지고, 루이 14세에게 로마에 프랑스 아카데미 본원 설립을 건의합니다. 1년에 단 한 명만 ‘로마 대상’ 수상자로 뽑아 로마 유학의 영예를 주었는데, 이는 아카데미에서 공부하는 모든 젊은 화가에게 강력한 동기부여가 되었고, 로마에서 실력을 쌓아 온 제자가 늘어나며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파리 예술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발전합니다.
르브룅이 푸생을 파리 아카데미 미술의 본보기로 삼으며 뛰어난 화가들을 길러낸 덕분에 파리는 단기간에 로마 예술에 근접하는 성과를 얻었지만, 권력을 위한 예술의 상징인 르브룅은 지금까지도 순수한 예술을 추구한 푸생과 비교 대상으로 여겨지며 많은 이의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 루이 15세와 로코코 시대
루이 14세의 죽음 이후 매일 반복되던 왕의 일과는 자연스레 흐지부지되었고, 베르사유에 머물던 궁정 인들도 다시 파리로 돌아갔습니다. 남은 건 허례허식과 복잡한 궁정 에티켓뿐이었죠. 유행 또한 바뀌었어요. 고전주의는 쇠퇴하고 로코코 시대가 열렸습니다. 루이 14세 시대에는 이 세상에서 화려할 수 있는 건 오직 자기 자신뿐이었기 때문에 귀족들과 신하들은 오직 왕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궁정 예술로 고전주의가 이어져 온 것이었죠.
하지만 왕이 죽자 그동안 억눌린 사치와 향락의 욕구가 봉인이 풀린 듯 터져 나와 너도나도 과시하는 데 돈을 쓰고 저택을 우아하게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예쁜 것’에 대한 탐닉이 온 나라를 지배했어요. 이런 시대를 처음으로 그려낸 화가는 ‘장 앙투안 와토’라는 인물로, 대표작으로는 <키테라 섬으로의 출항>이 있습니다. 와토의 뒤를 이어서는 왕실의 총애를 받았던 ‘프랑수아 부셰’가 이름을 알립니다. 그는 태피스트리, 연극 무대장식, 도자기, 패션 장신구에 이르기까지 감각적이고도 관능적인 그림을 그려냈어요. 가볍고, 밝고, 호화스럽고, 우아하고, 세련되고, 장식적이고, 에로틱한 그의 그림은 그 시대 사람들이 선망하던 아름다움 그 자체였습니다. 부셰는 루이 15세의 애첩 퐁파두르 후작 부인의 후원을 받았는데, 그녀는 부르주아 출신으로 귀족들의 무시와 견제를 받았지만 많은 예술가를 후원하고 계몽주의 철학자를 보호한 인물이에요. 이후 부셰의 제자, <그네>를 그린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가 로코코 시대의 절정을 이끌어갑니다.
이렇게 로코코 미술은 전 유럽으로 퍼져나가지만 로코코 특유의 경박한 우아함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루이 15세 시기 프랑스는 식민지를 필두로 고도성장을 하며 부르주아가 늘어나고,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돈도 많이 벌었지만, 그만큼 물가도 오르고 화폐가치도 떨어졌어요. 왕실은 세금을 계속 올리는 반면 귀족과 성직자들은 세금을 내지 않았기에 서민들과 가난한 농민들만 더 힘들어졌습니다. 그리고 후계자인 루이 16세가 왕이 된 후 기근이 이어지고 삶이 각박해지며 계급 간의 갈등이 고조되고, 혁명의 분위기가 프랑스를 뒤덮기 시작합니다.
키테라 섬으로의 출항_장 앙투안 와토
디아나의 목욕_프랑수아 부셰
그네_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혁명과 새로운 시대의 시작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나지만 어디에서나 사슬에 묶여 있다”
- 장 자크 루소
170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그 모습을 생생히 드러낸 고대 로마와 르네상스, 엄격함과 절제, 균형을 중시하는 계몽주의 사상이 대세를 이루던 시대. 프랑스 혁명과 루이 16세의 몰락, 새로운 황제 나폴레옹의 등장, 그리고 그 길을 함께한 자크 루이 다비드. 그는 신고전주의를 완성하고 혁명기 예술을 지배하는 권력을 잡았지만, 그와 동시에 늘 권력자의 몰락으로 함께 시련을 겪은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입니다.
루이 14세의 왕립 회화 조각 아카데미가 지금의 에콜 데 보자르가 되기까지, 예술과 정치를 넘나들며 전 세계 예술의 중심이 되도록 발전해 온 파리 예술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볼까요?
# 자크 루이 다비드 Jacques-Louis David
출처: 위키피디아
혁명의 화가이자 황제의 화가.
신고전주의 대표자로 평생 파리 화단을 대표했으나, 결코 쉬운 길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왕립 아카데미에서 네 번의 낙선 끝에 로마대상 수상자가 되었어요.
당시 로마는 헤라쿨레네움과 폼페이 유적 발굴로 문화 예술 중심지의 지위를 강화하고 있었고, 유럽 지식인들 사이에선 로마를 직접 둘러보는 ‘그랜드 투어’가 유행이었기 때문에 전 세계 예술가들로 북적였죠. 다비드는 미켈란젤로와 카라바조, 푸생의 영향을 받아 로코코를 벗어난, 누구보다 고전적인 그림 스타일을 확립했습니다.
이후 4년 만에 파리로 돌아와 찬사를 받으며 아카데미 회원이 되고, 제자들을 키워냈어요. 그리고 나폴레옹 몰락 후 망명지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호라티우스의 맹세_자크 루이 다비드
소크라테스의 죽음_자크 루이 다비드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Charles-Louis Napoléon Bonaparte
출처: 위키피디아
프랑스 군인이자 정치가. 대혁명 이후 뛰어난 전략으로 국가를 구하고 국민들의 막강한 지지를 얻어 황제에 올랐습니다.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는 주변국들을 차례로 정복하고 그 나라들을 다스리며 스페인,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스위스, 폴란드, 프로이센을 제외한 독일 지역까지 그의 제국이나 위성국가로 삼았습니다. 그의 정복지에서는 독재자로 악명을 떨쳤지만, 동시에 프랑스 혁명 정신이 심어졌고, 그 결과 유럽은 시민사회로 변화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 원정과 영국에 패배하며 연이은 배신과 이탈에 무너지다 결국 퐁텐블로성으로 퇴각하고, 엘바섬으로 유배를 떠나게 됩니다.
# 마리 앙투아네트 Marie Antoinette
출처: 위키피디아
루이 16세의 왕비. 루이 14세가 이룩한 절대왕정의 마지막 호사를 누리다가 대혁명 때 콩코르드 광장 단두대에서 죽임당했습니다.
오스트리아 여왕 마리아 테레사의 막내딸로, 프랑스 왕세자비로 시집을 와 힘든 시간을 보냈어요. 사치가 심했다고 알려졌지만 사실 과거 왕들이 흥청망청한 돈에 비하면 비교할 수도 없이 적은 금액이었습니다. 다만 오스트리아 궁정에서 너무 귀하게 자라 낯을 가리는 성격이던 그녀가 왕세자비 시절 신분이 낮은 애첩들과 거리를 두고, 왕비가 된 후에는 폐쇄적인 사교모임에만 발길을 해 그녀의 적이 늘어났어요. 그 적들은 외부로 왕비의 흉을 보고 다니며 없는 말까지 지어내었고, 그 결과 왕비에 대한 국민들의 평이 나빠진 거죠.
마리 앙투아네트 하면 떠오르는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잖아”는 사실 그녀가 한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루이 14세의 아내 테레즈가 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 프랑스 혁명
프랑스 혁명은 제3계급인 부르주아 시민 계급이 특권 계층(귀족과 성직자)을 제압하고 자신들의 세상을 만든 사건입니다. 당시 프랑스 인구는 2500만 가량이었고, 이중 특권층은 50만 명에 불과했어요. 하지만 이들은 전체의 절반에 달하는 토지와 재산을 갖고 있으면서 세금은 내지 않았죠. 미국 독립운동에 막대한 돈을 지원하고 왕실 재정이 바닥난 루이 16세는 세 계급의 회의체인 삼부회를 열어 재정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나, 오히려 갈등만 더 부추기는 꼴이 되었고, 이 삼부회에 군대를 보내 강제로 해산시키려 하다가 이때를 기회로 삼은 부르주아들이 저항하며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루이 16세는 혁명 초기 탈출할 기회가 있었으나 설마 자신을 죽이기야 하겠어? 라는 생각으로 궁에 남았고, 결국 가족 모두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어요. 혁명 초기에는 왕은 그대로 두는 입헌군주제가 될 뻔했는데, 왕은 자신의 권력을 전혀 포기할 생각이 없었고 그렇게 국민공회와 점점 멀어졌습니다. 그러다 뒤늦게 루이 16세가 왕실을 이끌고 파리에서 탈출하다가 발각되어 다시 끌려오게 되는데, 외국 군대와 손을 잡고 혁명을 진압하려 벌인 이 일이 치명타가 되었어요.
공교롭게도 당시 다비드는 국왕의 의뢰를 받고 그림을 그리던 중이었습니다. 사태가 점점 심각해지자 그를 비난하는 사람이 늘었고, 다비드는 왕의 그림을 그린 일을 부인하며 정치판에 뛰어듭니다. 그러다 결국 왕은 단두대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수백 년간 다스리던 시민들의 손에 이끌려서요.
이후 정치적 의견 대립으로 많은 사람들의 목이 단두대에서 잘려 나갔습니다. 특히 온건파인 지롱드당의 지지자로 국왕의 죽음에 충격받은 샤를로트 코르데이가 강경파의 리더 마라를 찾아가 칼로 심장을 찔러 죽이며 마라가 혁명의 상징이 되기도 했어요. 다비드는 마라가 죽은 날 밤 바로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자신과 가까웠던 마라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고민하다 그녀의 죽음의 장면을 그려냈죠. 높은 곳에서 내리는 빛이 종교적인 신비감까지 불러일으켜, 마라는 마치 그들을 대신해 죽은 예수처럼 보였고, 마라에 대한 숭배가 시작되었습니다.
마라의 죽음_자크 루이 다비드
# 판테온
출처: kenkaminesky
프랑스 혁명하면 빼놓을 수 없는 장소 중 하나. 여러 신을 모시는 신전이라는 뜻을 가진 판테온에는 프랑스를 빛낸 볼테르, 장 자크 루소, 빅토르 위고, 퀴리 부부 등 위인들이 잠들어 있습니다. 이 중에서도 18세기 문인이자 사상가 루소는 절대왕정 시대부터 이어온 구체제를 흔들었고, 왕은 하늘이 내린 것이라 믿던 시절 ‘왕의 권한도 국민들이 위임한 것’이라 주장하는 <사회 계약론>으로 충격을 주었죠. 이는 이후 시민혁명의 이론적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 바스티유 광장
출처: 위키피디아
판테온에 이어 바스티유 광장 역시 프랑스 혁명하면 떠오르는 장소입니다. 1789년 7월 14일 시민들이 파리 동쪽에 있는 작은 감옥을 습격하며 대혁명이 시작되었어요. 14세기에 지어진 이래로 악명높은 감옥이었던 이곳은 혁명기에 완전히 무너졌고, 지금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바스티유 광장 더 알아보기 (삼각형 클릭)
# 방돔 광장
출처: bigbustours
왕을 죽인 나라 프랑스는 모든 유럽 왕들의 적이 되었습니다. 본래 징병제로 강한 군대를 가지고 있었지만, 혁명으로 인해 여러 나라와 동시에 싸울 수는 없었죠. 빈틈을 타고 유럽 여러 나라가 동맹군을 결성해 사방에서 프랑스로 진격해 올 때, 기적적으로 연승을 하며 나라를 지킨 젊은 장교가 바로 우리가 아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입니다.
자신의 이미지 관리에 철저했던 나폴레옹은 전장에 늘 뛰어난 화가를 데려와 전투 장면과 영광의 순간을 그리게 했는데, 그런 나폴레옹이 가장 탐냈던 화가가 다비드였어요. 그는 다비드에게 수차례에 걸쳐 이탈리아에 동행할 것을 요청했지만 다비드는 늘 거절했습니다. 혁명 중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고, 당시 여론이 그러했듯 나폴레옹의 승리 가능성을 낮게 본 것이었죠. 결국 그 자리엔 다비드의 제자 ‘앙투안 장 그로’가 가게 되었고, 나폴레옹 곁에서 많은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나폴레옹은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오스트리아 연합군을 초토화시키며 이탈리아를 평정합니다. 천 년 넘도록 패배한 적 없는 베네치아도 무조건 항복할 정도로 완벽한 승리였어요.
파리로 돌아온 나폴레옹은 저녁 만찬에 다비드만 초대했습니다. 하지만 어떠한 부탁의 말도 하지 않았어요. 갑과 을 관계가 바뀐 것이죠. 다비드는 상황 파악을 하고 먼저 나폴레옹의 초상화를 그려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때 그린 작품은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지만, 그림은 미완성으로 남았어요. 믿거나 말거나지만 당시 나폴레옹은 다비드에게 그림 그릴 시간으로 겨우 세 시간을 허락했는데, 그마저도 잠시도 가만히 앉아있지 못했다고 해요.
보나파르트 장군의 초상_자크 루이 다비드
그 후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이집트 원정을 떠난 나폴레옹은 무려 150명의 학자를 대동해 고대 이집트 문명을 탐사합니다. 그 결과 로제타석 발견과 학술답사의 기록인 <이집트 해설>을 남겼지만, 군사적으로는 어려움을 겪었어요. 영국의 넬슨 제독에게 함대를 모두 잃고 발이 묶였다가 간신히 탈출에 성공해 파리로 돌아왔어요. 그러나 나폴레옹이 없는 사이 파리는 더 큰 혼란에 빠져있었어요. 전쟁은 계속 패배하고, 정치가들은 싸움만 일삼았죠. 이에 나폴레옹은 시에예스 등과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고 제1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런 다음 주변 국가들을 하나하나 굴복시키며 이탈리아 원정군을 구해냈어요.
이제 다비드는 완전한 나폴레옹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두 번째 이탈리아 원정을 기념하며 다비드가 그린 <생 베르나르 고개를 넘는 나폴레옹>은 지금까지도 가장 유명한 나폴레옹 그림으로 알려져 있어요. 그런데 이 그림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폴레옹의 ‘꼼꼼한’ 간섭하에 그려졌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실제 나폴레옹의 모습과는 차이가 있는 편이에요.
생 베르나르 고개를 넘는 나폴레옹_자크 루이 다비드
이런 나폴레옹의 역사가 담겨있는 광장이 바로, 파리가 자랑하는 명품 샵과 고급 호텔이 들어선 방돔 광장입니다. 광장 한가운데에는 높은 청동 탑이 하나 있는데, 그 위에 나폴레옹이 서 있어요. 이 탑은 로마 트리아누스 황제의 승전기념탑을 본떠 만들었는데, 200미터가 넘는 이 탑을 만들기 위해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빼앗은 적의 대표 1200여 문을 녹였다고 해요. 나선형으로 올라가는 탑에는 치열했던 전투 장면들이 담겨 있습니다.
방돔 광장 더 알아보기 (삼각형 클릭)
# 루브르 박물관
출처: heinen-doors
루브르 박물관에서 모나리자에 이어 또 다른 유명한 그림은 <나폴레옹의 대관식>입니다. 다비드는 이 그림을 무려 3년에 걸쳐 그렸는데, 높이가 7미터, 폭이 10미터, 그림 속 등장인물은 70여명에 육박해요.
나폴레옹은 1804년 국민투표를 통해 황제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찬성은 350만 표였는데 반대는 1580표 뿐이었어요. 역대 왕들의 대관식은 랭스 대성당에서 행해졌었지만 나폴레옹은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했습니다. 이곳의 분위기가 더 좋다는 이유였어요. 그리고 당시 교황이었던 비오 7세를 불러 들러리 역할만 시키며 철저히 이용했어요. 나폴레옹은 샤를마뉴 대제를 계승한다고 천명해 부르봉 왕조의 그림자를 지우고, 스스로 월계관을 쓰면서 황제의 권력은 교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독립적인 것이라는 걸 모두에게 각인시켰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치밀하게 계산된 대관식 행사 장면을 화폭에 담기 위해 다비드는 고심 끝에 황제의 대관식이 아닌 황후의 대관식을 그리기로 합니다. 아무래도 나폴레옹 스스로 자기 머리에 월계관을 얹는 장면은 모양새가 썩 좋지 않았거든요. 이 구상에 상당히 만족한 나폴레옹은 한 가지 주문을 더합니다. 교황이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닌, 손을 들어 이 행사를 추인하고 자신을 축복하는 모습으로 그리라는 것이었어요. 황제의 권위는 작은 틈도 허용되지 않았어요.
나폴레옹의 대관식_자크 루이 다비드
작업을 시작한 다비드는 완벽하게 자연스러운 그림을 위해 무수한 스케치를 그려냅니다. 등장하는 모든 인물을 작업실로 불러 얼굴과 자세를 그리고, 그날 입은 실제 의상을 공수받아 의상 부분을 완성했어요. 나폴레옹의 얼굴은 완전한 측면으로 그려졌는데, 이는 금화에 등장하는 로마 황제들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전쟁에서 돌아와 나중에야 그림을 보게 된 나폴레옹은 한 시간 동안 그림에 빠져있을 정도로 만족하며 찬사했다고 해요. 얼마나 흡족했는지 그해 살롱전에서 다비드에게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하기도 했죠.
# 나폴레옹의 몰락과 다비드의 망명
나폴레옹이 연이은 패배끝에 엘바섬으로 유배를 떠난 이후, 새로 부임한 루이 16세의 동생 루이 18세는 과거의 구체제로 돌아가고 싶어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바꾼 세상은 그 뒤로는 돌아갈 수 없었어요. 사람들은 새로운 왕에게 실망했고, 나폴레옹을 그리워했습니다. 힘겨루기에서 밀려나 나폴레옹에게 줄을 대려는 이들도 늘어났어요. 나폴레옹은 기회가 왔음을 느끼고, 치밀하게 준비한 끝에 몰래 배를 타고 프랑스 칸에 상륙합니다. 모든 이가 쫒겨난 황제의 등장에 놀랐지만 수비대 앞에서 그는 무기를 버리고 말합니다. “원한다면 그대들의 황제를 죽여라”. 수비대원들은 발포명령에도 불구하고 총을 버리고 “황제 폐하 만세”를 외쳤고, 나폴레옹은 칸에서 파리까지 1000km가 넘는 대장정을 통해 다시 황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시대는 오래가지 못했어요. 나폴레옹이 다시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은 동맹군을 다시 뭉치게 했고, 급조된 프랑스군과 동맹군의 전투에서 영국에게 완패하며 파리로 퇴각했습니다. 이렇게 그의 시대는 완전히 끝난 것이죠. 미국으로 망명할 수도 있었지만 시일을 미루다 결국 영국에 체포되어 대서양의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보내졌습니다.
나폴레옹의 사람이었던 다비드 역시 감옥살이를 피하기 위해 역시 프랑스를 떠나야 했어요. 인생에 두 번째 시련이 찾아온 것이었죠. 다비드는 벨기에로 망명을 갔는데, 넓은 궁전을 제자들과의 아틀리에로 사용하고, 극장에 갈 때도 VIP 대접을 받고, 많은 이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며 열심히 작품활동을 했습니다. 하지만 과거와 같은 역량을 보여주진 못했어요. 이를 보고 많은 이들은 늘 권력을 지향하고 출세를 위해 열정을 쏟았던 그에게 벨기에는 잘 보여야 할 군주도 없고, 올라갈 지위도 없는 그저 망명지였기 때문이라 말해요.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즐겁게 이야기하다가도 프랑스 이야기만 나오면 침울해졌다고 해요. 여전히 조국을 사랑했지만, 다시 프랑스로 돌아가기엔 그가 나폴레옹과 너무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하루는 웰링턴 장군이 다비드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달라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다비드는 코웃음을 치며 거절했어요. 그러다 그 웰링턴 장군이 벨기에를 방문했을 때, 다비드 아틀리에를 찾아와 다시 부탁했습니다. 하지만 다비드는 정중하고 단호하게 “저는 역사화만 그리는 사람입니다. 개인의 초상화는 그리지 않습니다.”라며 거절했어요. 당시 다비드의 방에는 말을 타고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의 그림이 걸려있었고, 다비드의 완고한 뜻에 웰링턴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돌아갔다고 해요. 그가 한 말은 나폴레옹에 비하면 자신은 그저 평범한 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말이었기 때문이죠.
# 죽음
1821년, 세인트 헬레나에서의 6년의 시간이 지나고 나폴레옹이 사망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다비드에게 파리로 돌아가자고 했지만 그는 돌아갈 마음이 없었어요. 병들고 기력도 약해진 그는 마지막까지 붓을 놓지 않고 <에로스와 프시케> 등 작품을 완성하고, 마지막까지 <아펠레스와 캄파스페>를 그렸으나 끝내 완성하지는 못했습니다.
1827년 12월 19일, 다비드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제자들과 동료 화가들이 그의 얼굴을 그리고 오른손을 석고로 본뜬 후에 전통에 따라 그의 몸을 해부하고 심장을 꺼내 따로 보관했어요. 그때 그의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커서 많은 사람들이 놀랐다고 전해지기도 합니다. 아무튼 당시 프랑스 당국의 거부로 그의 시신은 파리로 돌아오지 못하고 심장만 돌아왔고, 그 후 혁명 200주년을 맞아 유해를 가져와 심장과 함께 묻으려 했으나, 이번엔 브뤼셀 시의 반발로 성사되지 못하고 다비드는 지금까지 파리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에로스와 프시케_자크 루이 다비드
아펠레스와 캄파스페_자크 루이 다비드
# 파리 재개발 사업과 철도의 개통
오스만 남작의 파리 재개발 사업 현장
출처: paris.fr
나폴레옹 몰락 후 프랑스는 다시 정치적 격변기를 맞이하며 또 한 번의 혁명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나폴레옹의 조카, ‘나폴레옹 3세’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어요. 1851년 의회를 해산하고 새 헌법을 제정한 그는 국민투표에서 97%의 압도적 지지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는데, 그 당시는 농업, 상업, 산업의 발달로 물질적 번영이 찾아온 시기였어요. 오랜 기간 런던에서 망명했던 황제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 파리를 런던보다 더 현대적이고 고급스러운 도시로 만들기 위해 도시 개발 사업을 시작합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파리는 중세부터 이어진 좁은 골목과 더러운 하수도로 인해 콜레라가 창궐하고 있었는데, 엄청난 추진력을 가졌던 총책임자 오스만 남작이 파리 모든 구역을 정비하여 파리 전역에 큰 도로망을 직선으로 이어 연결하고, 60만 채가 넘는 대저택과 공공건물, 주택을 전부 밀어버렸습니다. 그때 만든 건물의 높이는 7층이었는데, 이는 불이 났을 때 소방 활동을 할 수 있는 최대 층이 7층이었기 때문이에요.
파리는 가로등을 갖게 되었고, 사람들은 오페라와 발레, 음악회, 연극 공연을 찾아다니며 무도회장에서 밤을 즐겼습니다. 물론 전에 비할 것 없이 쾌적해지기도 했어요. 직선의 큰 도로 사이사이에 광장과 정원을 조성했고, 도시 동쪽과 서쪽에 대규모 숲을 조성해 대도시임에도 세계에서 가장 맑고 신선한 공기를 누리게 되었어요. 또한 대대적인 상하수도를 건설했죠. 물론 이에 따라 많은 성당과 유서깊은 건물들이 사라지는 바람에 시민들과 지식인들이 옛 파리를 지키기 위해 저항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파리는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파리 중심에서 그나마 옛 모습을 유지한 곳이 오늘날 쇼핑과 편집샵으로 유명한 ‘마레 지구’입니다.
카유보트, 비오는 날 파리의 거리_시카고 미술관(미국)
출처: 위키피디아
당시 새롭게 탈바꿈한 파리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은 카유보트의 <비 오는 날, 파리의 거리>입니다. 섬세한 소묘와 차분한 색조, 화려하지 않은 배색을 가진 완벽한 인상주의 그림으로 평가받는 이 그림은 자신들이 살아가는 도시의 한순간을 현대적으로 담아냈다는 평을 받아요. 이렇게 파리의 삶은 기차의 탄생과 함께 극적으로 변해가는데, 이는 곧 화가들의 그림에도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일일생활권이 넓어지며 작업실이 아닌 야외에서도 그림을 그리는 것이 가능해지고, 화가들은 멀리 스케치 여행을 할 수 있게 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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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렇게, 프랑스 예술의 2막, 사실주의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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