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위키피디아
“세계 예술의 중심지, 파리”
프랑스 국내를 넘어 전 유럽의 관심을 받으며 파리를 세계 예술의 중심지에 이르게 한 ‘살롱전’이라는 극한의 경쟁은 지금의 입시학원과 다를 바 없이 당시 그림을 배우던 제자들을 ‘그림 그리는 기계’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살롱전에 입선할 기회를 얻기 위해 모두가 파리로 몰려들었죠. 절대 넘어설 수 없을 것 같던 로마를 뛰어넘어 오늘날까지 ‘미술 유학’의 본고장으로 자리 잡게 만든 그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다비드의 제자들
프랑스 신고전주의 대표 인물 다비드는 엄격한 구도와 정제된 선, 고전적 아름다움, 통일과 조화, 표현의 명확성을 추구하는 작품을 그려냈습니다. 그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살아가며 대혁명과 나폴레옹 시대의 정치적, 사회적 변화에 큰 영향을 끼치며 예술 활동을 했죠.
19세기 전반 파리는 점령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다비드의 제자들. 그들이 이끌어간 다음 시대는 고전주의에서 현대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낭만주의와 사실주의를 끌어냈어요. 격변하는 세상 속 로마의 미술에서 벗어나 예술계의 혁명을 일으킨 화가들의 이야기가 지금 시작됩니다.
# 샤를 보들레르 Charles Baudelaire
출처: 위키피디아
"내 인생은 처음부터 저주받았음이 틀림없습니다. 이러한 운명은 평생 계속되었지요."
19세기 프랑스의 천재 시인이자 미술평론가. 모더니즘 미학을 확립하고 마네를 비롯한 많은 화가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프랑스, 파리의 우울, 악의 꽃, 금치산, 댄디즘. 모두 샤를 보들레르 하면 떠오르는 단어에요. 19세에 이미 현대성을 획득한 천재로, 자신의 유일한 시집인 <악의 꽃>을 남기며 시인이 되었습니다. 보들레르는 이 시집을 '세상의 모든 고통을 담아 놓은 사전'이라고 자평했어요.
마네와 이후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시인 보들레르는 1857년 시집 <악의 꽃>을 발표하며 엄청난 논란에 휩싸입니다. 제목은 물론이고 그 내용까지 파격적이었던 탓인데요. 빅토르 위고도 이 시집이 추구한 현대성과 공감각 등 ‘새로운 전율’이라는 격찬을 했지만, 악의 꽃은 곧바로 당국의 탄압을 받았습니다. 시집에 담긴 노골적인 성적 묘사와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던 내용들이 종교와 풍속을 해친다는 이유였어요. 재판에서 보들레르는 여섯 편의 시를 삭제하라는 명령과 벌금형을 받았는데, 이 덕분에 베를렌느, 랭보, 말라르메, 발레리 등 진취적인 여러 예술가들의 추종과 지지를 받으며 유명세를 얻었습니다.
# 베르트 모리조 Berthe Morisot
출처: 위키피디아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로, 로코코 시대의 화가인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의 손녀입니다.
마네를 추종했으며 한때 그의 연인이기도 했어요. 마네를 만난 이후 모리조의 회화는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양식으로 변화했습니다. 마네의 작품에 직접 모델로 서기도 했으며, 마네에게 '외광회화'를 권유하기도 했습니다.
그녀의 작품은 자신이 속한 계층과 여성이라는 점 때문에 받았던 19세기의 문화적인 제한들을 반영하고 있어요. 따라서 도시풍경화나 누드화는 없고 전원 풍경화, 초상화, 그리고 가정적인 삶의 이미지만이 존재합니다.
요람_베르트 모리조
식당에서_베르트 모리조
# 귀스타브 쿠르베 Gustave Courbet
출처: 위키피디아
“그림은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에만 적용되어야 한다. 망막에 비치지 않은 것을 그려서는 안 된다”
사실주의 미술의 선구자. 농촌의 비참함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그의 작품들은 '사실주의 미술의 신호탄'으로 평가됩니다. 미술가동맹의 회장으로 정치 활동도 활발했으나, 파리 코뮌이 무너진 후 체포되며 파산했습니다.
그의 대표작 <돌을 깨는 사람들>과 <오르낭의 매장>은 사실주의 미술의 신호탄으로 평가받으며, 또 다른 유명한 작품으로는 <안녕하세요 쿠르베 씨>가 있습니다.
돌을 깨는 사람들_귀스타브 쿠르베
안녕하세요 쿠르베 씨_귀스타브 쿠르베
# 외젠 들라크루아 Eugène Delacroix
출처: 위키피디아
낭만주의 미술의 대표적인 화가
최고의 색채 화가, 낭만주의의 선도자, 장엄하면서도 열정적인 힘 있는 작품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그의 작품은 초기 고전주의에서부터 바로크적 특징과 낭만주의적 요소에 이르기까지 두루 포함하고 있습니다. 말년에는 역사화와 정부 건물에 그린 뛰어난 벽화로 인기를 얻었고, 프랑스 왕립 학술원의 회원으로 선출되었어요.
두껍게 칠하는 임파스토 기법과 새로운 색채로 오귀스트 르누아르, 조르주 피에르 쇠라 등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어요. 그의 걸작 중에는 1830년 7월의 파리 항쟁을 묘사한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 있습니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_외젠 들라크루아
이도교와 싸우는 파샤_외젠 들라크루아
# 카페 Le Procope
출처: ma-plume-webmag
17세기 오스만 제국에서 온 사절이 루이 14세에게 커피를 대접한 이후 귀족들 사이에서 커피가 유행으로 번지며 프랑스에 커피가 처음 소개되었습니다. 한동안 귀족들의 전유물이던 커피는 이내 ‘생 제르맹 데 프레(Saint-Germain-des-Prés)’에서부터 대중들에게도 판매되기 시작했어요.
처음엔 영세한 형태였던 카페는 시칠리아 출신의 ‘프란체스코 프로코피오 데이 콜텔리’의 카페 ‘르 프로코프’를 시작으로 화려하게 변신합니다. 거울로 장식한 벽과 화려한 샹들리에, 대리석 테이블 등 궁전을 연상케 하는 이 카페는 오픈 이후 인기를 끌었고, 그날의 뉴스를 벽보에서 볼 수 있도록 하며 당시 파리 지식인들에게 인기를 끌었어요.
카페 르 프로코프 더 알아보기(삼각형 클릭)
이렇게 르 프로코프가 성공하자 곧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장소마다 카페가 생기기 시작했고, 19세기 무렵에는 수천 개로 늘어났다고 해요. 1860년 당시 파리는 오스만의 파리 재개발 사업에 의해 신도시로 탈바꿈하고 있었습니다. 옛 도시의 모습은 사라지고 재건축되었는데, 그중 바티뇰(Batignolles)지역에 젋은 화가들이 모이며 유명한 카페들이 생겨났어요.
앙리 팡탱 라투르의 <바티뇰의 화살>은 마네에 대한 존경을 담은 그림입니다. 그림을 그리는 마네를 그의 동료와 후배들이 지켜보는 모습인데, 이때는 아직 인상주의 전시회가 열리기 전이라 인상주의라는 이름도 없었죠. 하지만 이들은 매주 목요일 저녁마다 바티뇰의 카페에 모여서 그림에 대한 토론을 나누었습니다. 마네가 이끌던 이 모임의 멤버로는 그림 속 인물들 이외에 드가, 세잔, 시슬레, 피사로 등이 있어요. 그들은 마네를 존경하고 따랐는데, 그래서 사람들은 이들을 ‘마네 패거리’ 혹은 ‘바티뇰 그룹’이라 불렀다고 해요. 훗날 모네는 이 모임을 회고하며 “바티뇰 가 저녁 모임을 통해 우리는 비전을 세웠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게 되었다”라고 말했습니다.
바티뇰의 아틀리에_앙리 팡탱 라투르
출처: 위키피디아
돈이 없던 화가들에게 카페는 싼값에 식사를 해결하고 차나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어요. 늦은 밤까지 그림에 대한 이야기와 토론을 하며 많은 영감을 불러 일으키고, 힘든 좌절의 나날 속에 그림에 대한 의욕을 북돋아주었죠. 이렇게 카페는 예술의 혁명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파리지앵하면 길거리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열띤 토론을 하는 모습이 떠오르지 않나요? 파리를 빛낸 위대한 인물들이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며 하나의 문화를 만든 것이 지금껏 이어져 이들의 일상이 된 거예요.
하지만 오늘날 파리 카페는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1960년대만 해도 무려 20만 개의 카페가 있었는데 현재는 3만 여 곳만 남았다고 해요. 이러한 변화가 온 데에는 먼저 금연제도를 이유로 들 수 있습니다. 원래 카페 하면 담배가 떠오를 정도로 카페에서 담배 피우는 게 당연시되었는데, 이제는 금연법이 제정되어 파리에서 실내 흡연을 할 수 없고, 도로변 자리에서만 흡연을 할 수 있어요. 다른 원인으로는 세태의 변화도 있습니다. 진지한 토론을 하고 영감을 주는 대화를 나누기에 세상은 너무 빠른 속도로 변하고, 각박해진 것이죠. 하지만 여전히 전세계에서 온 여행객들이 파리지앵의 자리를 메우고 있습니다.
생제르맹 데 프레 카페 더 알아보기 (삼각형 클릭)
# 다비드의 제자, 장 오귀스트 앵그르
출처: 위키피디아
다비드의 애제자이자 에콜 데 보자르에서 미술을 배우며 스무 살의 어린 나이에 로마대상을 수상한 엘리트 화가
그는 전쟁 중 예산 부족으로 몇 년이나 지난 후에 로마로 가게 되었는데 그 대신 다른 화가들에 비해 오래 로마에 머물렀습니다. 그곳에서 나름 인정받으며 고전주의 화풍의 그림을 그렸고 그 덕분에 나폴레옹 몰락 이후 정치적 격변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1824년 파리로 돌아온 후 앵그르는 살롱전에 출품한 <루이 13세의 성모에의 서약>을 통해 파리 화단 중심 인물로 떠오르고, 여러 초상화와 관능적인 그림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이런 앵그르는 제자들을 혹독하게 훈련시킨 걸로도 유명해요. 로마 아카데미 원장으로 경력을 쌓은 그는 데셍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예술에서 눈물을 쏟지 않고 우수한 결과를 얻어낸다는 건 불가능하다. 고통을 모르는 자, 믿음도 없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죠. 그렇게 그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매끈하고 완벽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그의 작품들은 루브르박물관 대작전시실과 쉴리관 1층 전시실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대 오달리스크_앵그르
호메로스의 예찬_앵그르
발팽송의 목욕하는 여인_앵그르
# 문호의 개방과 라이벌의 등장
프랑스 정부의 공인 미술 전시회 ‘살롱전’은 200여년이 넘는 시간동안 전세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미술 전시회이자 신인 화가의 등용문이었습니다. 원래 왕립 아카데미 소속 화가들에게만 출품 자격이 주어졌는데 혁명 시기를 지나며 일반 화가들에게도 그 문호가 개방되었어요. 이는 파리 예술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당시 파리 화단은 아카데미 규범 아래에서 유사한 주제와 스타일로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었는데, 일반 화가들이 참여하며 새로운 그림을 선보이게 된 것이죠.
앵그르가 파리 화단의 지배적 위치에 있을 때, 그와 완전히 다른 화풍으로 모두의 주목을 끈 화가, 낭만주의의 선도자로 불리는 ‘외젠 들라크루아’가 등장합니다. 그는 혁명과 전쟁, 내전, 학살이 난발하던 시대에 부합하는 드라마틱하면서도 현란한 그림을 주로 그렸는데, 그런 주제에 대한 찬반 격론의 중심에 서며 앵그르의 라이벌로 급부상해요. 틀에 갇힌 완벽한 그림을 거부하고 바로크적인 감성으로 강렬한 색을 사용하며 프랑스 낭만주의의 대표주자가 되었죠.
초반에는 ‘회화의 학살자’, ‘파리를 불태워버리려는 작자’라는 악평을 받기도 했지만, 당대 유명한 문인들은 그를 열렬히 지지했어요. 실제로 들라크루아는 문학에서 많은 영감을 받으며 이를 작품에도 드러냈습니다. 이렇게 들라크루아와 앵그르는 서로를 의식하며 경쟁했습니다.
# 고전과 현대, 그 사이 어디쯤
들라크루아,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_내셔널 갤러리(런던)
출처: 위키피디아
앵그르의 그림은 17세기부터 이어져 온 파리 엘리트 회화의 전통, 즉 아카데미 화풍을 계승하고 있었습니다. 푸생부터 르브룅, 다비드로 이어져 온 고전주의적 전통으로, 이 근원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라파엘로’로 거슬러 올라가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앵그르를 ‘파리의 라파엘로’라 불렀습니다.
반면 들라크루아의 그림은 고전적 회화의 개념을 완전히 뒤엎었어요. 그림은 무조건 선을 먼저 그리고 그 위에 색을 입히는 것이었는데, 그는 번지듯 색채를 인접시켜 형태를 완성해 가는 기법을 사용해요. 우리가 잘 아는 고흐도 들라크루아를 존경하며 “예수의 얼굴을 그릴 수 있는 화가는 이 세상에 단 둘 뿐이다. 하나는 렘브란트요, 다른 하나는 들라쿠르아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영감이 떠오를 때마다 테마를 적어 목록을 남겼는데, 그 양이 어마어마했다고 해요. 머릿속에 무언가 떠오르면 바로 캔버스로 달려가 순식간에 작품을 그려내는 스타일이었고, 그에 대한 자부심도 있었던 천재형 화가였어요. 하지만 그림의 소재를 선택할 때만큼은 들라크루아도 고전주의에서 멀어지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델라크루아는 고전 그림과 현대 그림을 이어준 화가라는 평가를 받아요.
# 사실주의의 등장
앵그르의 신고전주의와 들라크루아의 낭만주의가 대립하던 시기, 이 둘 모두를 부정하는 새로운 사조 ‘사실주의’가 등장합니다. 대상을 사실적으로 그린다는 점에서 사실주의는 서양 미술의 오랜 전통이긴 했지만, 19세기의 사실주의는 그야말로 ‘있는 그대로 그린다’는 것이었어요. 아름답게 미화하거나 이상적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요. 이런 사실주의의 대표주자는 ‘귀스타브 쿠르베’입니다.
언젠가 그에게 천사를 그려달라는 주문이 들어왔는데, 단호하게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천사? 내 앞에 데려온다면 똑같이 그려주겠소” 자부심이 강했던 그는 그야말로 건방진 사람이었어요. 젊은 시절 살롱전에서 연이어 낙선하면서도 많은 자화상을 그렸는데, 이는 ‘자신만의 개성’을 표현한 작업에 몰두한 것이었죠. 또한 쿠르베는 왜 그림이 항상 역사만 다루는지 의문을 가졌어요. 그는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과 동네의 토속적인 장면들도 그림이 될 수 있다고 믿으며, <오르낭의 매장>을 출품합니다. 이 작품은 실제 크기의 사람들로 그려진 거대한 그림이었는데, 당시 사람들은 누군가의 죽음을 어떻게 이렇게 크게 그릴 수 있냐며 비난했어요.
쿠르베는 종종 고객들의 기호에 따라 사실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여인의 누드화도 그렸습니다. 하지만 살롱전처럼 자신의 미술관을 드러낼 때는 전혀 미화하지 않은 여인의 누드를 그렸죠. 대표적으로 <목욕하는 여인들>이 있습니다.
오르낭의 매장_귀스타브 쿠르베
목욕하는 여인들_귀스타브 쿠르베
쿠르베, 화가의 아틀리에_오르세 미술관
출처: 위키피디아
기존 화단이 이런 ‘무례한 화가’를 비난할 때 쿠르베를 지지하던 자가 바로 <악의 꽃>의 시인 ‘보들레르’입니다. 물론 보들레르도 쿠르베의 극단적인 사실주의에 전적으로 동의한 건 아니지만, 기존 아카데미식 회화보다는 쿠르베가 옳다고 생각했어요. 이렇게 두 사람은 오랜 우정을 쌓게 되죠. 쿠르베는 보들레르의 모습을 그리기도 했는데, <화가의 아틀리에>에서 오른쪽 구석에 책을 읽고 있는 사람이 보들레르입니다.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가 공존하는 이 역작은 너무 크다는 이유로 만국박람회에서 퇴짜를 맞았고, 그는 박람회장 옆에 창고였던 건물을 개조해 개인 전시관을 만들어 자기 작품 40여 점을 전시하며 ‘최초의 화가 개인전’을 열었어요. 이후 사실화와 사냥 장면 등을 주로 그리며 유럽 전역과 미국에 이름을 날렸습니다.
인상주의의 아버지
“마네는 이 시대를 생생하고 명쾌하게 포착하려는 확고한 목표가 있다. 그의 대담한 상상력이 빛을 발하는 건 이 때문이다” - 보들레르
눈에 보이는 현실을 그리면서 때로는 평면적인 화면구성을, 때로는 밝고 신선한 색채로 화면을 그리며 시각의 자율성과 순수성을 추구하고, 근대회화의 가장 중요한 선구자의 한사람이 된 마네. 그의 혁신적인 표현은 훗날 피사로와 모네 등 인상파 화가들에게 주목받았습니다. 모더니즘의 창시자이자 인상주의 아버지로 불리는 마네의 그림 이야기, 들을 준비 되었나요?
# 에두아르 마네 Édouard Manet
출처: 위키피디아
인상주의 아버지이자 모더니즘의 창시자.
한동안 인상주의 화가로 분류되었고 실제로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지만, 인상주의 전시회에 자신의 작품을 단 한 번도 출품하지 않았습니다.
파리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이고 작품 활동을 하며 시인 샤를 보들레르, 소설가 에밀 졸라 등이 속해 있던 지식인들의 모임에서 활발히 활동했습니다. 권위 있는 기성 미술계인 살롱전에서 인정받고 성공을 거두기를 희망했지만 그의 미술적 급진성은 당대 주류 비평계의 혹평을 받았어요.
대표작으로 1863년 낙선전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 와 1865년 살롱 입선작 <올랭피아>가 있습니다.
풀밭 위의 점심식사_에두아르 마네
올랭피아_에두아르 마네
# 낙선전
화려했던 앵그르와 들라크루아의 19세기 전반이 지나 후반이 되어서도 파리 미술계는 여전히 아카데미 화풍의 발밑에 있었습니다. 로마대상 수상자 출신인 교수진들이 살롱전 심사위원을 겸임하다 보니 자연스러운 결과였어요. 당시 프랑스를 지배하던 나폴레옹 3세는 예술도 국가의 영광을 드러내는 수단이라 믿었고, 살롱전의 책임자로 슈느비에르 후작을 임명합니다. 황제의 취향을 잘 알고 있던 후작은 새롭게 대두되던 쿠르베나 마네의 인상주의보다는 고상하고 우아한 그림만 선정하도록 지시했어요. 그리고 그런 그림만 살롱전에 걸리고 칭찬받으니 관람객의 눈도 여기에 길들었습니다.
그러다 1863년 심사위원들이 평소보다 더 엄격한 기준으로 적은 수의 화가들과 작품만 입선시켰는데, 이때 떨어진 화가들의 불만이 터져 나와 사회적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낙선한 이들의 작품만 모아서 전시하는 ‘낙선전’이 열렸어요. 단순히 화가들을 달래기 위한 용도로 시작된 낙선전은 엄청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도대체 어떤 그림이 떨어졌는지 보기 위한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지만 이미 ‘떨어진 그림’이라는 선입견을 가진 사람들의 평가는 좋을 리 없었습니다.
마네, 풀밭 위의 점심식사_오르세 미술관
출처: 위키피디아
그 어떤 그림보다 낙선전에서 가장 많은 욕을 먹으며 유명세를 탄 그림이 마네가 그린 <풀밭 위의 점심식사>입니다. 이 작품은 16세기 베네치아의 거장 조르조네의 <전원의 합주>를 연상시키는데, 사람들은 마네의 그림을 보는 순간 엄청난 모욕감을 느낀 거예요. 옷을 입은 남자들 틈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자의 모습과 당당하고 도발적으로 관람객을 바라보는 그림을 통해, 앞에선 고상한 척 하지만 뒤로는 온갖 추잡한 짓을 하던 자신들의 치부가 드러났다고 생각했거든요.
심지어 황제도 이 그림을 바라보다 이렇게 말합니다. “참으로 뻔뻔스럽군”. 그 한마디로 인해 낙선전에 관심이 전혀 없던 사람들도 이 그림을 보기 위해 찾아왔고, 마네는 파리 최고 유명 인사가 되었습니다. 엄청난 비난을 받았지만 동시에 마네의 역량을 알아보는 사람들도 생겼어요. 보들레르는 마네에게 자신의 예술론을 들려주며 용기와 확신을 심어주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마네와 얽힌 엄청난 스캔들로 낙선전은 놀라운 흥행을 하며 현대 회화의 시작점을 열었습니다. 살롱에 발을 디딜 수 없었던 비주류 화가들이 낙선전을 통해 이름을 알리고, 이후 인상주의 전시회를 비롯한 개인 전시회가 열린 것도 모두 이 낙선전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어요. 또한 비주류 화가들의 작품을 투자의 기회로 보는 사람들이 등장하며 미술을 거래하는 민간 화상들도 활성화되었습니다. 이렇게 19세기 후반 민간 화상의 성장과 동시에 살롱전의 영향력은 줄어들게 됩니다.
전원의 합주_에두아르 마네
# 출생의 비밀
마네, 황실에서의 오찬 / 전면에 보이는 소년이 마네의 아들 레옹이다.
출처: 위키피디아
파리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마네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많은 유산을 물려받고 몇 년 동안 동거하던 수잔 렌호프와 결혼했습니다. 이미 열한 살이 된 레옹도 아들로 들였죠. 마네는 재치 있고 유머러스했지만 가끔 신경질적이고 감정 기복이 있었는데, 수잔은 그를 잘 받아줬어요. 그리고 젊은 시절 바람기가 있던 남편을 포용해 주기도 했습니다.
수잔은 마네가 그림을 공부하던 사춘기 시절 피아노를 가르치던 두 살 연상의 선생님이었어요. 세간에는 18살의 마네와 수잔이 사랑을 나누었고 그러다 낳은 아이가 레옹이었는데, 아버지가 무서워 이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레옹을 몰래 키우다가 무려 10년이 지나서야 아들로 받아들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레옹은 그동안은 수잔의 동생으로 키워졌는데 세례식의 대부모는 마네와 수잔이였어요.
그런데 최근 마네 연구가들이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마네의 아이로 알려진 레옹이 사실은 마네 아버지 오귀스트의 아들이라는 것이에요. 이들의 주장에는 꽤 말이 되는 근거가 있습니다. 그건 바로 마네가 유산을 물려받는 과정에서 생긴 의문인데요. 마네가 죽은 아버지로부터 많은 유산을 받을 때 거기에는 레옹을 친자로 받아들이는 조건이 있었고, 마네가 죽은 후 이 유산은 수잔을 거쳐 레옹에게 주어지도록 명시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거론되는 근거는 마네 어머니의 언행입니다. 마네가 살아있을 때도 어머니와 수잔의 사이는 극도로 나빴는데, 마네가 죽은 후 어머니가 상속 분쟁을 일으키며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마네에게는 자기가 낳은 자식이 없다”
레옹의 아버지는 누구일까요? 먼 훗날 레옹조차 자신의 출생배경과 집안 내력에 알지 못한다고 했던 만큼 진실은 여전히 미궁 속에 남아있습니다.
# 찢어버리고 싶은 그림
마네, 올랭피아_오르세 미술관
출처: 위키피디아
낙선전 이후에는 전통 그림 이외에도 신진 화가들의 그림이 살롱전에 전시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너무 유명해진 마네는 심사위원들에게 탈락시키기 부담스러운 화가가 되었죠. <풀발 위의 점심식사>는 명함도 못 내밀 만큼 어마어마한 비난과 함께 큰 스캔들을 일으킨 작품 <올랭피아>가 살롱전에 걸렸습니다. 그림 속에는 한 여인이 침대에 누워 관람객과 마주보고 있고, 그녀 옆에는 흑인 하녀가 막 도착한 손님으로부터 받은 꽃다발을 들고 있고, 침대 발치에는 꼬리를 치켜든 고양이가 있습니다.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이 그림은 파리의 고급 창녀를 노골적으로 그린 그림이에요.
사람들은 모델이 너무 예쁘지 않고 납작하게 그려진 데다 피부색이 창백해 시체 같다고 비아냥댔어요. 평론가들도 이에 합세해 비난했는데, 그럴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일부 관람객들은 이 그림을 찢어버리겠다고 난동을 피워 부득이하게 그림을 가장 높은 곳에 걸어둘 수밖에 없었어요. 자신만만하던 마네도 너무나 많은 비난으로 의기소심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의에 빠진 마네는 스페인으로 도피 여행을 떠났고, 이 여행이 마네의 그림을 결정적으로 바꾸게 됩니다.
당시 그는 스페인풍의 그림, 그중에서도 스페인 화가 벨라스케스에게 매료되어 있었는데, 정작 스페인에 가서 그동안 자신을 매료시킨 것은 ‘스페인풍의 그림’이 아닌 ‘동시대 사람들을 생생하게 그려낸 것’임을 깨달았어요. 보들레르가 누누이 이야기한 현대성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 것이죠. 깨달음을 얻은 마네는 서둘러 파리로 돌아왔고, 매독에 걸려 마비가 된 보들레르를 정성껏 돌봐주며 그의 마지막을 함께했습니다. 이후 소설가 에밀 졸라와 시인 말마르메 등 당대 유명 문인들도 마네를 적극 옹호했지만 살롱전은 여전히 그를 외면했어요. 하지만 마네는 살롱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우르비노의 비너스_티치아노
시녀들_벨라스케스
# 사랑스러운 여인
마네, 제비꽃을 든 모리조_오르세 미술관
출처: 위키피디아
초상화 속 여인은 마네의 동료 화가로서, 여러 작품의 모델로서, 평생 마네의 곁을 지킨 뮤즈 ‘모리조’입니다. 로코코의 대가 프라고나르의 후손으로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였지만 당시 사회는 여자가 화가가 될 수 없는 분위기였어요.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할 수도 없었고 취미 정도만 허용될 정도였죠.
하지만 다행히도 자유로운 가정에서 자란 그녀는 풍경화의 거장 장 밥티스트 카미유 코로에게서 사사하고 루브르에서 거장들의 그림을 모사하며 그림 실력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모리조는 화가들 사이에서 인기도 많았고, 1864년부터 거의 매년 살롱전에 입선했어요. 하지만 그녀의 뒤에는 늘 ‘아마추어 같다’는 꼬리표가 있었습니다.
인상파 화가들과 어울리며 ‘에드가 드가’와 미묘한 관계에 있기도 했지만 자기중심적인 드가는 여자의 마음을 리드하는 타입이 아니었어요. 모리조의 마음에서 그런 드가를 마네가 밀어냅니다. 마네의 그림에 푹 빠진 모리조는 자신만의 그림을 마네를 통해 얻을 수 있다고 확신했고, 둘은 자주 어울리며 마네에 대한 모리조의 애정도 깊어졌습니다. 마네의 관심이 어린 여제자 곤잘레스에게 쏠리면 불타는 질투심을 느끼기도 하고, 마네가 아내 수잔에게 애정을 표시하면 그것에 대한 불만도 표시했어요. 보불전쟁과 파리 코뮌의 어려운 시간을 함께할수록 둘의 사이는 깊어졌고, 마네도 모리조에게 빠져들었습니다. 둘은 서로에게 영감을 받으며 그림을 그렸어요. 이 시기에 그려진 그림이 바로 <제비꽃을 든 베르트 모리조>입니다. 마네가 자신을 그리고 싶다고 했을 때 모리조는 세상을 얻은 듯 기뻐했다고 해요.
당시 많은 이들은 마네가 수잔과 결혼하지 않았다면 무조건 모리조와 결혼했을 거라 했습니다. 둘의 관계에 대해 입소문이 커질 때쯤 마네가 그녀에게 제안합니다. 자기 동생 외젠과 결혼하라는 것이었죠. 처음에 모리조는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생각했지만, 그 둘이 함께할 수 있는 건 그 방법뿐이었어요. 다행히 외젠은 모리조를 좋아하고 있었고, 아내 모리조가 남자 동료들과 어울리는 것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지 않고 오히려 인상파 전시회를 열어주는 등 아내를 도왔습니다. 모리조는 자기 집에 살롱을 열고 화가들과 문인들을 초대하기도 했는데, 르누아르와 말라르메가 그 단골이었다고 해요. 사랑으로 한 결혼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묵묵히 서로를 지켜주었어요.
마네가 쉰다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모리조는 마네의 위대함을 알리는 일을 이어가며 꾸준히 그의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마네가 죽은 후 몇 년 되지 않아서 세상이 마네에게 열광하기 시작했어요. 모리조조차 황당할 정도로요. 마네가 세상을 떠난 지 4년 후 외젠도 숨을 거두고, 몇 년 후에는 모리조도 죽음을 맞이합니다. 당시 17살이었던 딸 쥘리는 드가가 보살펴줬어요. 그가는 후에 좋은 신랑감을 정해주는 등 의붓아빠 노릇을 잘 해냈습니다.
# 미술계의 혁명가
마네, 피리부는 소년_오르세 미술관
출처: 위키피디아
마네는 작업실에서 인공조명을 받아야만 그 모습을 드러내는 환영주의 그림을 거부했습니다.
<피리 부는 소년>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중간색을 정교하게 덧칠하며 3차원적인 형태를 만드는 것이 아닌, 어두운색과 밝은색을 분명히 대조시켰죠. 그리고 정면 조명을 도입해 그림 전반을 평면적으로 표현하고 배경 공간도 가능한 깊이를 줄이려 했어요. 이런 의도를 알고 보면 이 그림은 굉장히 사실적이에요. 이런 마네의 혁명성을 당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마네는 미술에서 의미, 교훈, 감상과 같은 허울을 벗겨냈습니다. 그동안 아카데미의 고전적인 미술은 숭고한 주제로 관객들의 영혼을 움직이고 교훈을 주려 했기 때문에 화가들에게 고대 신화과 종교 등 많은 공부를 요구했는데, 마네는 그냥 보이는 그대로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풀밭 위의 점심식사>와 <올랭피아>가 바로 이 연장선에 있는 그림이에요. 사람들은 마네의 그림에 어떤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부르주아를 조롱하기 위해 이런 그림을 그렸다고 믿었지만, 사실 마네는 그냥 보이는 걸 그렸습니다.
마네,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_코돌드 갤러리(런던)
출처: 위키피디아
마네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완성한 작품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은 고전적 주제의 그림을 자신만의 감각으로 현대적으로 변모시키는 걸 잘했던 마네가 도시 정서를 포착해 낸 대표적인 그림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서커스와 발레 공연이 펼쳐지는 폴리 베르제르 극장을 즐겨 가곤 했는데, 이 극장 바에서 일하는 종업원은 성매매를 하기도 했어요. 이 환락의 공간에서 마네는 쓸쓸한 공허함을 그려냈습니다.
# 카메라의 등장
출처: 위키피디아
15세기 처음 유럽에 등장한 카메라는 나무상자 모양의 장치였습니다. 라틴어로 ‘어두운 방’이라는 뜻을 가진 ‘카메라 옵스쿠라’는 빛이 좁은 구멍을 통과할 때 외부에 있는 물체가 암실 벽에 거꾸로 비치는 현상을 이용해 만든 것이었죠. 화가들은 그림을 그릴 때 이 장치를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1850년경부터는 기술이 발달해 사진 찍는 시간이 짧아지고 품질도 올라갔으며, 당시 파리에 사진작가가 많이 등장하기도 했어요.
이런 변화는 화가들에게 위기를 가져왔습니다. 높은 수준의 인물 사진이 가능해지자 초상화의 수요가 줄어들었어요. 인물 사진을 처음 접한 낭만주의 화가 ‘폴 들라로슈’는 “이제부터 회화의 역사는 끝났다”라고 말한 걸로도 유명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사진을 이용하는 화가도 있었어요. 들라크루아는 사진이 미처 포착하지 못한 포즈를 사진을 활용해 잡아냈고, 앵그르 등 초상화가들은 고객을 덜 고생시키기 위해 사진을 활용했어요. 풍경 화가들도 스케치보다 사진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고, 인상주의 화가들도 사진을 이용했죠.
그러나 한계는 있었습니다. 많은 시간을 투자해 정교하고 고상한 그림을 그리던 아카데미 화가들은 점점 심한 타격을 받기 시작했어요. 1880년에는 세계 최초로 개인 휴대용 사진기가 등장하며 인물, 풍경, 정물 등 모든 분야의 그림이 위협받았습니다. 사진기의 등장으로 위협받는 예술 세계. 미술은 어디로 향할까요? 모네, 르누아르, 세잔, 고갱, 고흐. 미술을 잘 몰라도 이름 한 번쯤 들어봤을 화가들이 그 질문에 답을 들려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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