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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데릭 오귀스트 바르톨디

설명
자유의 여신상의 아버지, 바르톨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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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콜마르
작성자
엘린 OP
엘린 OP
최종 편집자
헤일리 TL
헤일리 TL
최종 편집 일시
2024/04/19 14:06
상태
작성 완료
1차 작성 완료
피드백 요청
헤일리 TL
헤일리 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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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the collector.com
 “자유의 여신상은 뉴욕의 상징 아닌가요? 왜 콜마르에도 있는 거죠..?” 뉴욕의 상징인 자유의 여신상에 대해서는 모두 익히 알고 있을 텐데요. 프랑스의 소도시인 콜마르에도 자유의 여신상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어요. 과연 어떤 이유로 콜마르에 자유의 여신상이 와있는 걸까요? 프랑스와 미국, 그 사이에 어떤 숨은 이야기가 있는지 궁금하지 않나요?
목차
바르톨디, 그는 누구인가?
당신이 모르는 ‘자유의 여신상’의 모든 것
콜마르에서 발견하는 바르톨디의 흔적

1. 바르톨디, 그는 누구인가?

천재 조각가 프레데릭 오귀스트 바르톨디는 프랑스 콜마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지방 행정 구역의 고문이자 부유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지만 바르톨디가 2살 때 세상을 떠났어요.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바르톨디의 어머니는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파리로 이주했고, 어린 바르톨디는 일찍이 예술적인 재능을 뿜어내 파리에서 본격적으로 교육을 받게 되었어요. 특히 조각에 관심이 많았던 바르톨디는 1852년 처음 개인 작업실을 열게 되었죠.
다음 해인 1853년 파리 살롱에 참여하는 등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한 바르톨디는 콜마르에서 라프 장군의 조각상을 제작해 달라는 의뢰를 받았고 그의 첫 작품이 1856년에 콜마르에 세워지게 됩니다. 스물 한 살이였던 그 해 다른 화가들과 함께 이집트와 예멘을 여행한 바르톨디는 이집트의 고대 건축물과 조각을 보며 거대한 동상을 제작해야겠다는 꿈을 키우게 돼요. 그래서 수에즈 운하 건설 책임자를 찾아가 운하 입구에 거대한 여신상을 세우자고 제안하지만, 안타깝게도 거절당하고 그 자리에는 평범한 등대가 세워지게 됩니다. 결과를 떠나서 실행력과 추진력이 정말 대단했죠?
바르톨디는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도 보르도, 리옹, 콜마르 등의 도시에 세워질 분수대와 조각상의 주문 제작이 끊임없이 들어와 조각가로서의 입지를 단단히 다지게 되며 대단한 명성을 얻게 됩니다. 이후 그는 프랑스의 정치가인 ‘라부라이’에게 솔깃한 제안을 받는데요. 미국의 독립전쟁 승리 100주년을 맞이하여 자유를 상징하는 작품을 제작한다는 것이었고, 수에즈 운하 입구에 세우려고 했던 그 동상을 떠올린 바르톨디가 제작한 것이 바로 그 유명한 ‘자유의 여신상’이라고 전해지고 있어요.
바르톨디는 프랑스 출신의 동료였던 잔 에밀 바외와 결혼해 활발한 작품 활동을 이어가다 결핵으로 인해 1904년 70세의 나이로 파리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었어요.

2. 당신이 모르는 ‘자유의 여신상’의 모든 것

# 자유의 여신상의 탄생
자유의 여신상은 전 세계적으로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조각상으로, 미국의 자유와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져 있어요. 미국의 독립전쟁 당시 미국을 지원했던 프랑스는 그간 쌓아온 미국과의 우정을 나타내기 위해 1886년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자유의 여신상을 만들어 선물했어요.
자유의 여신상은 프랑스의 역사학자인 에두아르 르네 드 라부라이에가 착안하였고, 바르톨디가 조각하여 외관을 제작하였으며, 에펠탑을 만든 귀스타브 에펠이 내부 뼈대를 설계하여 만들어졌어요. 정식 명칭은 ‘세계를 밝히는 자유(Liberty Enlightening the world)’ 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유의 여신상(Statue of Liberty)으로 알고 있어요.
1875년 프랑스에서 착공해 1884년에 완공되었지만, 이를 다시 해체해 210개의 나무 상자에 담아 미국 뉴욕의 리버티섬으로 옮겨 재조립하게 됩니다. 1886년 10월 28일 동상이 모습을 드러내며 봉헌식을 가졌어요. Grover Cleveland 대통령을 포함하여 수천 명의 사람들이 참석했으며 연설, 음악 및 퍼레이드로 성대한 축하와 환영을 받았습니다.
# 처음의 색은 붉은색?
자유의 여신상은 철 125t을 사용하여 내부 골격을 만들고 겉면에는 구리 31t을 씌워서 제작되었어요. 그래서 자유의 여신상이 처음 세워졌을 땐 윤기 있는 구릿빛을 띄고 있었죠.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구리에 녹이 슬었고, 공기 중의 산화와 대기오염의 콜라보로 지금의 청록색으로 변하게 되었어요.
동상의 색깔이 변하자 뉴욕시 공무원들은 처음 동상이 세워졌던 때의 본래 색인 구리색으로 복원하기 위한 사업을 추진했어요. 하지만 뉴욕 시민들은 지금의 푸른색을 더 좋아했기 때문에 이에 반대했고, 결국 색 복원 사업은 이뤄지지 않아 현재 푸른색을 유지하게 되었답니다.
또한, 구리로 만들어진 거대한 금속 조각물이라 벼락을 피할 수 없어 현재까지 무려 600번의 벼락을 맞았다고 하는데 정말 놀랍죠?
# 원래 ‘자유의 여신상’은 등대였다?
처음 자유의 여신상이 세워질 당시의 용도는 뉴욕 항을 바라보며 바다를 비추는 등대의 역할이었어요. 16년 동안이나 오른손의 횃불이 등대의 역할을 했지만, 구름에 반사되어 선박 운항에 방해가 된다는 청원으로 인해 등대의 역할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죠.
하지만 자유의 여신상은 실제로 미국 공식 등대목록의 381번으로 등록되어 있으며, 현재는 미국을 상징하는 랜드마크이자 관광지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 횃불과 독립선언서
(왼) 자유의 여신상 / (오) 자유의 여신 리베르타스
자유의 여신상은 로마 신화의 자유의 여신인 리베르타스를 상징해요. 그러나 작품 속 리베르타스가 노예 해방을 상징하는 프리기아 모자를 쓰고 있는 것에 반해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은 일곱 개의 뿔이 달린 왕관을 쓰고 있답니다. 이는 미국이 독립전쟁으로 일구어낸 자유와 평등이 전 세계 7개의 대륙과 7개의 대양으로 널리 퍼져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요.
또한, 자유의 여신상은 작품 속 리베르타스 여신이 장대를 들고 있는 것과는 달리 양손에 횃불과 책을 들고 있어요. 여기서 횃불은 세계 곳곳을 밝히는 이성의 빛을 의미하며, 왼손에 든 책은 로마 숫자로 미국의 독립기념일인 1776년 7월 4일이라고 적혀 있어 미국의 독립선언서를 상징하는 것이랍니다.

3. 콜마르에서 발견하는 바르톨디의 흔적

# 콜마르에도 자유의 여신상이?
출처: 세계일보
콜마르 시내 구시가지를 돌아다니다 보면 곳곳에서 바르톨디의 흔적을 찾을 수 있어요. 첫 번째로 만날 수 있는 흔적은 바로 ‘자유의 여신상’인데요. 미국에 있어야 할 자유의 여신상이 왜 콜마르 길 한복판에 서 있는 걸까요?
사실, 바르톨디가 살아 있을 당시에는 없었으나 바르톨디 사망 100주기를 기념해 그를 기리고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 콜마르 북쪽 입구에 제2의 자유의 여신상을 설치했어요. 시내 중심가에 위치하고 있지는 않지만 지나가는 길에 이 자유의 여신상을 발견하게 된다면 인증샷 잊지 마세요!
혹여나 발견하지 못하더라도 실망하지는 마세요! 콜마르 시내를 걷다 보면 바닥 곳곳에 앙증맞은 자유의 여신상이 그려진 황금빛 직삼각형을 발견할 수 있어요. 이 표식은 콜마르 시내의 랜드마크를 소개하는 길잡이가 되어 주기도 하고, 콜마르 출신의 천재 조각가인 바르톨디의 업적을 다시 한번 떠올릴 수 있게 해준답니다.
# 바르톨디 박물관
출처: c.colmar
자유의 여신상이 그려진 귀여운 표식을 따라가다 보면 바르톨디 박물관에 닿을 수 있는데요. 마르샹 거리에 있는 바르톨디가 태어나고 거주했던 18세기의 저택을 개조하여 1922년에 ‘바르톨디 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문을 열었어요.
그림, 판화, 자유의 여신상 스케치, 조각상 등 바르톨디의 많은 작품을 통해 그만의 천재성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고 실제로 이 박물관에 대한 콜마르 시민들의 자부심이 아주 대단하기 때문에 콜마르를 여행한다면 한 번쯤은 들러보았으면 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출처: 오마이뉴스 / <벨포르 사자상>
특히, 위의 작품은 <벨포르 사자상>으로, 바르톨디가 1870년의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당시 프랑스의 패배에 자극을 받아 만든 작품인데요. 벨포르 사자상은 프랑스군이 백일이 넘는 전투를 통해 사수한 벨포르의 요새 아래에 세워진 조각상이에요. 바르톨디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만큼 그의 작품 중 가장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고 있고, 프랑스인들에게도 잔뜩 사랑받으며 프랑스의 국민 조각가로 우뚝 서게 됩니다.
전시실에 전시된 여러 벨포르 사자상들을 보면 그가 이 작품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여실히 느낄 수 있어요. 각 사자의 크기도 다양하고 얼굴 표정도 다르며, 자세도 각자 조금씩 다르니 바르톨디가 벨포르의 사자상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고 애썼던 흔적이 그대로 드러나죠. 바르톨디의 치열한 노력의 결과물이 바로 이 사자상이라고 볼 수 있어요.
이 밖에도 바르톨디 박물관에는 자유의 여신상 전시실이 따로 있고, 그 조각상을 운반한 선박의 모형도 함께 전시되어 있어요. 1875년부터 10여 년에 걸쳐 자유의 여신상을 만들었는데 여신의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흘러내리는 옷자락 그리고 조그만 신체 부분까지 모두 정성을 들여 만들었어요. 실제로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자유의 여신상의 습작을 보면 감탄을 금치 못하는데, 초기 습작들의 경우에는 여성이 아니라 남성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고 하니 10년간 얼마나 많은 고민과 시행착오를 거쳐 이렇게나 위대한 작품이 탄생한 것인지 감히 예상하기도 어렵죠?
지금 이 칼럼을 읽은 워너비들도 콜마르를 여행하게 된다면, 꼭 바르톨디 박물관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 전시실’에 방문해 바르톨디의 천재적인 재능과 수많은 노력의 과정을 몸소 느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바르톨디 박물관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얻고 싶다면?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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