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는 가우디 건축물 보러 가는곳이라는데 건축쪽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서요.. ”
바르셀로나를 다녀온 사람이라면 ‘바르셀로나의 주인은 가우디’ 라고 말해도 다들 수긍할 거예요. 로마에 가면 콜로세움을 보고, 파리에 가면 에펠탑을 보듯이 스페인 바르셀로나를 여행하게 되면 꼭 만나게 되는, 아니 만나야 하는 것이 바로 가우디의 작품입니다. 어떤 작품들이 있는지 함께 살펴볼까요?
1. 가우디는 누구인가?
# 가우디의 청소년기
가우디는 1852년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 타라고나 주에서 태어났습니다. 가족이 운영하고 있던 공방에서 대장장이였던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도우며 자라 자연스럽게 공간을 다루는 능력과 사물의 부피를 다루는 기술들을 익히고 배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우디는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한 편이었기 때문에 여름이면 가족들과 함께 리우둠스(Riudoms) 지역의 별장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요. 도시보다 자연에 가까운 이 별장에서의 생활이 훗날 자연과의 협력을 추구하고 자연을 존중하려는 가우디의 건축 스타일을 정립하는데에 큰 역할을 하게 되었죠.
1870년, 가우디는 바르셀로나 대학에서 건축학을 공부하게 됩니다. 당시 그를 가르치던 교수님들도 호불호를 크게 가질만큼 그는 남다른 아이디어를 냈다고 해요. 건축학교를 졸업하던 때에 대학교 학장이 가우디에게 최하위 점수를 주면서 “우리가 지금 건축사 칭호를 천재에게 주는 것인지, 아니면 광인에게 주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라고 말했다고 하는데요. 그가 얼마나 천재적이면서 독특했던 인물이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 구엘을 만나다
1978년 어느 날, 우연히 한 모임에 나간 가우디는 자신의 건축 인생에서 가장 든든한 후원자인 ‘에우세비 구엘 백작’이라는 사업가를 만나게 됩니다. 둘은 예술에 대한 공통된 관심사를 바탕으로 두터운 우정을 다져 나갔고, 구엘 백작은 가우디가 건축가로서 재능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게끔 그를 후원해주었죠.
구엘 백작이 가우디에게 본인의 저택을 지어달라고 의뢰하면서 “당신이 원하는 대로 만들어 봤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고, 이에 지어진 저택이 바로 그의 첫 번째 대규모 건축물이자 동시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기도 한 ‘구엘 저택’이에요.
# 가우디의 마지막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공사에 집중하기 위해 성당의 지하실로 거처를 옮긴 가우디는 1926년 6월 7일, 저녁 기도를 하기 위해 산트 펠립 네리 성당에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으로 이동하던 도중, 지나가던 노면 전차에 부딪혀 부상을 당하고 맙니다. 그러나 운전수는 당시 74세였던 가우디를 지저분한 노숙자로 생각하고, 길 옆에 팽개친 채로 그냥 떠나버렸죠.
이후 사람들이 병원으로 데려가고자 택시를 찾았지만 역시 가우디를 노숙자로 생각한 택시 기사들은 그를 그냥 지나쳐 버렸고, 여러 시도 끝에 간신히 잡은 택시를 타고 병원까지 갔음에도 두 곳의 병원에서 역시나 진료 거부를 당해 결국 빈민들을 구제하기 위한 무상 병원에 방치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겨우 정신을 차린 가우디가 병원 간호사에게 자신의 이름을 말하자 병원 관계자들은 경악하며 그제서야 가우디의 친척들과 친구들에게 급히 연락을 했다고 해요.
서둘러 달려온 지인들이 다른 병원으로 옮기자고 했지만 가우디는 “옷차림을 보고 판단하는 사람들에게 이 거지 같은 가우디가 이런 곳에서 죽는다는 것을 보여줘라.” 라고 말하며 끝까지 빈민 병원에 남았고, 결국 3일만인 1926년 6월 10일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가우디의 장례식은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에서 성대하게 거행되었고, 가우디의 시신은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 지하 묘지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2. 가우디의 작품들
# 구엘 저택
구엘 저택은 가우디가 그의 후원자였던 에우세비 구엘 백작을 위해 1886년에 설계한 대저택으로, 건축가의 길에 입성한 이래 처음으로 큰 규모의 작업을 하게된 건축물입니다. 건축이 진행되던 당시 ‘철’은 굉장히 비싼 재료였는데요. 가우디는 이 철로 집 내외부의 장식들을 모두 만들어 당대 최고 재력가 중 하나였던 구엘 조차도 그 비용에 휘청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철 장식들을 보면 가우디의 기술에 감탄하게 되는데 이는 어릴적부터 대장장이였던 아버지를 도와 다양한 제련 기술을 습득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죠.
구엘 저택은 지하부터 지상 5층까지 총 6층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지하는 ‘마굿간’이라 불리는데, 기둥 하나 하나에도 아름다운 곡선을 살려 건축했고 지상으로 올라와 스테인드 글라스 장식을 자세히 살펴보면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 등장인물들과 카탈루냐 지방의 문양, 그리고 구엘 백작의 이니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과거 예배 공간으로 쓰였던 2층 홀에서는 개관 시간에 맞춰 오르간 연주가 흘러나오는데 높은 천장덕에 아름답게 울리는 파이프 오르간의 선율은 황홀함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죠. 옥상에는 꼭 만화에 나올 법한 귀엽고 제각기 다른 모습을 한 20여 개의 굴뚝이 있는데 깨진 타일이나 벽돌을 사용한 ‘트렌카디스 기법’으로 만들어진 것을 볼 수 있어요.
철재와 석재, 목재 등 다양한 소재가 조화롭게 혼합된 구엘 저택은 가우디의 건축 철학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건물이자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8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 구엘 공원
가우디는 바르셀로나 도시의 전경과 탁 트인 지중해 해변이 내려다 보이는 이 언덕에 부자들을 위한 대형 주거단지를 만들고 싶어했습니다. 그의 든든한 후원자인 구엘이 아테네의 델포이를 재현시킨 전원 주택단지를 만들 것을 제안하여 이 곳에는 약 60여 채의 주택이 들어설 예정이었죠. 고급 건축물과 사생활이 엄격히 보장되는 담을 쌓아 일반인과 적절히 격리된 유토피아적 도시를 세우기 위해 구엘의 지원을 듬뿍 받은 가우디는 입이 떡 벌어지는 대형공간을 창조해나가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구엘 아파트’가 아닌 ‘구엘 공원’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유는 결국 가우디의 계획대로 완성되지 못했기 때문인데요. 구엘 공원이 위치한 언덕은 높고 험난한 지형인데다가 어마어마하게 높은 집세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충분히 모이지 않아서 공사는 결국 중단될 수밖에 없었답니다. 대신 오늘날 이렇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원이 되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며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죠.
공원 중앙의 큰 광장에는 광장의 모서리를 따라 타일로 장식된 긴 벤치가 있는데, 투박한 돌에 색색깔의 타일을 붙여 만든 곡선 형태의 긴 벤치를 보면 꼭 커다란 뱀이 살아 움직이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광장 밑으로는 86개의 도리아식 기둥이 있는 방이 있고, 그 방의 밑에는 광장 위에서 떨어지는 빗물과 기둥 안에 설치해둔 하수관을 통해 떨어지는 물을 모아두는 물탱크가 있어요. 이렇게 모아진 물은 왕들이 지나다니는 계단에 있는 3개의 분수 중 용의 조각상 입으로 나오고 있답니다.
가우디는 정원 곳곳에 다양한 상징들을 남겨 놓았는데요. 공원 입구의 쉼터는 구엘이 매료되었던 인도의 코끼리를 본떠 만들었고, 공원 벤치에 장식된 게 모양은 가우디 자신의 별자리를 상징합니다. 또한 입구 계단의 도마뱀 조형물과 여러가지 조각품들은 연금술을 상징하고 있다고 해요.
구엘 공원은 자연에 가까운 공원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고, 가우디의 자연주의와 곡선의 미학 그 자체를 보여주는 아주 특별한 공간인만큼 바르셀로나를 찾는 많은 여행객들의 필수 코스로 자리하고 있답니다.
# 카사 바트요
스페인어로 ‘Casa(카사)’는 ‘집’이라는 뜻으로 이 건물은 ‘바트요의 집’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당시 섬유 산업계의 큰 부자였던 조셉 바트요는 1877년 그라시아 거리의 한 건물을 매입한 뒤 가우디에게 리모델링을 의뢰했고, 가우디가 약 1년 6개월 동안 건물의 내외부를 리모델링하여 바트요 가문을 위한 유일무이한 대저택을 지어주었죠.
카사 바트요의 곳곳에는 가우디 특유의 자연을 담은 요소들과 그만의 독특한 상상력들이 숨어 있어요. 이 건물은 ‘해골의 집’, ‘뼈의 집’, ‘용의 집’ 이라는 별명들을 가지고 있는데, 건물의 외관이 마치 뼈와 해골, 그리고 용의 비늘과 비슷하게 보여서 붙여진 별명들입니다. 이런 독특한 외관을 갖게 된 이유는 바르셀로나의 수호성인인 ‘성 게오르기오스’가 용과 싸워서 이긴 전설을 모티브로 하여 건축되었기 때문이에요.
현관으로 들어가면 보이는 나선형의 계단도 용의 척추뼈 형상을 하고 있는데, 이런 동물을 닮은 요소들 덕분에 마치 거대한 동물의 몸속을 탐험하는 듯한 경험을 할 수 있답니다.
# 카사 밀라
카사 밀라는 역시나 ‘밀라의 집’이라는 뜻으로 약 100년 전, 당시 부르주아 계층이었던 밀라 부부의 의뢰를 받아 가우디가 건축한 주택입니다. 외관을 보면 마치 파도가 굽이치는 듯한 모습이고 발코니에 붙은 검은 철제 장식들은 꼭 바다에 떠다니는 해초를 연상케 하죠. 건물 가운데에는 뻥 뚫린 파티오(안뜰)를 만들어 카사 밀라의 모든 공간에 따사로운 햇살이 들어오게끔 설계되었습니다.
하지만 가우디가 카사 밀라를 완공했을 당시 사람들은 마치 비행기를 저장하는 창고 같다며 그를 조롱했어요. 또한 ‘채석장’이라는 뜻의 ‘라 페드레라(La Pedrera)’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카사 밀라의 독특한 벽면이 아파트가 아니라 꼭 돌을 캐는 채석장 같다 하여 비웃음조로 붙인 이름이랍니다. 가우디가 성심성의껏 만든 건축물인데 이러한 평가를 받았으니 아주 서러운 일이었겠죠?
또한, 카사 밀라를 작업하던 도중 건축을 의뢰한 밀라 가문의 안주인인 세지몬 여사와 가우디 간의 갈등도 있었는데요. 밀라 부인은 당시 시대 상황 때문에 자신의 집에 종교적 색채를 입히지 않기를 요청했지만,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던 가우디는 성모 마리아 상을 옥상에 만들고 싶어 했어요. 이후 밀라 가문과의 격렬한 갈등은 소송으로까지 번지게 되고 결국 가우디는 끝내 마리아 상을 만들지는 못했지만 남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한 문구를 옥상에 새기게 됩니다.
“Ave - Gratia - M - Plena - Dominus - Tecum”
- 가브리엘 대천사가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알린다
옥상 테두리에 있는 M 이니셜을 본 밀라 가문은 처음에는 자신의 이름 중 한 글자를 따서 장식한 건 줄 알고 아주 기뻐하였으나, 추후 이 사실을 알게되고는 가우디에게 격한 분노를 느꼈다고 해요. 가우디도 절대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었던 거죠.
카사 밀라의 지붕에는 유리와 타일 조각들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굴뚝도 발견할수 있는데요. 이는 ‘트렌카디스 기법’으로 자연을 사랑하는 가우디가 자연을 보호하며 건축하는 방법을 실천하기 위해 개발한 기법으로, 버려진 유리와 타일 조각 등의 물건들을 재활용하여 건축 장식으로 활용한 것입니다.
카사밀라의 다락방에는 바르셀로나 유일의 가우디 박물관이 있어, 가우디가 구체적으로 어떤 자연물에서 영감을 받았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카사밀라는 여전히 주민들이 살아가고 있는 주거 공간으로, 건물의 일부만 관광용으로 오픈되어 있어요.
# 사그라다 파밀리아
‘신이 머무를 지상 유일의 공간’이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는 사그라다 파밀리아(성 가족 성당)는 가우디의 생애 마지막 작품이자 아직도 공사가 이어지고 있는 인류의 대작입니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던 가우디는 이 성당을 설계하기 위해 오랜 시간 다른 건축물 작업을 하며 테스트를 마쳤고, 그 이후 무려 40년이라는 시간을 쏟아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완성하는 것에 집중헀습니다. 결국 숨을 거둬 이곳의 지하에 묻히기까지 했으니 인생의 역작을 남기고자 온 힘을 쏟아 부었던 가우디의 열정과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마지막 건축물인 셈이죠.
사실 가우디는 성당 공사가 진행될수록 본인 생전에 이곳이 완성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고 하는데요. 이 위대한 성당을 자신의 손으로 완성시킬수 없음에 아주 안타까워 했다고 전해집니다. 하여 가우디가 세상을 떠난 뒤, 후대의 건축가들이 그의 뜻을 계승하여 오늘날까지 약 100년이 넘는 시간동안 작업을 이어오고 있죠.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예수의 탄생, 수난, 영광을 나타내는 3개의 파사드와 예수의 열 두 제자를 뜻하는 거대한 12개의 탑이 있으며, 내부는 마치 나뭇가지가 상층부를 지탱하는 모양처럼 설계되어있어 꼭 하얀 숲에 들어온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아름답다는 말로는 설명이 부족한 성스러운 공간이에요. 낮과 밤이 완전히 다른 느낌을 주는 곳이니 바르셀로나에 왔다면 꼭 방문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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