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명성이 자자했던 스위스 용병, 스위스 용병은 왜 유명할까요?”
척박한 곳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가족과 함께 살아남기 위해 전쟁터를 선택했던 스위스 용병들. 돈을 벌어 가족에게 돌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기는 것’밖에 선택지가 없었을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1. 스위스 용병단 ‘라이슬로이퍼’
# 가난한 나라, 스위스
물가가 비싸기로 유명한 스위스는 2023년 기준, 1인당 GDP가 9만 3,457달러에 달하는 세계 최부국이지만 한때는 유럽에서도 특히 가난한 나라에 속했답니다. 그들이 가난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스위스의 지형적 특성과 경제 구조 때문이었는데요.
스위스는 험준한 산맥과 호수로 이루어져 있어 농사를 짓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산지의 25% 정도에서 작게나마 경작이 가능하긴 했지만 기온이 낮은 스위스의 특성상 그마저도 생산성과 품질이 떨어졌고 비용도 많이 들어 사실상 스위스 경제에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죠. 이뿐만 아니라 자원 부족이라는 큰 문제도 있었습니다. 스위스는 철광석, 석탄 등의 중요한 천연 자원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던 19세기에도 크게 성장할 수 없었어요.
하지만 스위스 사람들에게는 이 험준한 산악 지대에서 지내면서 얻은 폐활량과 체력이 있었죠. 자연적으로 습득한 탁월한 신체 능력과 기초 체력을 바탕으로 스위스 사람들은 ‘용병 제공’이라는 독특한 방식으로 삶을 꾸리게 되었어요. 외국에서 용병으로 활동하며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고, 국가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는 등 스위스 용병들은 가난했던 국가의 경제를 지탱하게 되었습니다.
현재는 바티칸의 교황청을 제외하고 스위스 자국민이 외국을 위해 복무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어요. 교황청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칼럼을 끝까지 읽어보세요!
# 무적의 할버드
‘라이슬로이퍼’라고 불리던 스위스 용병들이 무적의 아이콘이 되었던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사용했던 독특한 무기인 '할버드' 때문이었습니다.
할버드는 1.5~2.5m 정도 되는 긴 자루 끝에 도끼, 창, 갈고리를 결합한 무기로, 적을 멀리서 찌르거나 가까이에서 도끼로 공격하는 등 거리에 상관없이 다양한 전투 방식을 구사할 수 있었죠. 할버드는 기사들이 타고 있는 말을 무력화하는 데 특히 효과적이었으며 말을 타고 전투를 하는 기병을 최고로 인식하던 당시, 스위스 용병들은 할버드를 사용해 보병으로서 최초로 기병을 이기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로 인해 스위스 용병들은 ‘무적’에 가까운 이미지를 갖게 되었어요.
또한 할버드는 효과적인 방어 무기로도 활용되었는데요. 이런 다양한 활용은 그들의 전술적 유연성을 높여주었고, 상황에 따라 공격과 방어를 쉽게 전환할 수 있었기 때문에 불리한 상황에서도 거뜬하게 적을 물리칠 수 있었어요. 그러니 할버드를 손에 쥔 스위스 용병들의 용맹함과 전투력이 세계로 알려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겠죠?
2. 스위스 용병단의 신뢰 (1) 빈사의 사자상
# 프랑스 대혁명
1792년 8월 10일, 프랑스 혁명군은 프랑스의 국왕 루이 16세가 머물던 튈르리 궁전을 공격했습니다. 이날 궁전을 지키던 프랑스 군대는 이미 모두 도망가버렸고, 혼자 남은 국왕을 지키기 위해 싸운 이들은 다름 아닌 스위스 용병들이었어요.
786명의 스위스 용병들은 국왕의 명령에 따라 튈르리궁을 방어하며, 수십 시간 동안 수천 명의 혁명군과 싸웠습니다. 스위스 용병들은 단 한 명도 도망치지 않고 전력을 다해 싸웠지만 결국 숫자가 월등히 많았던 혁명군에게 패하여 전원이 전사하게 되죠. 이러한 그들의 용감한 투쟁은 ‘튈르리궁의 대항전’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되고 있어요.
과연 그들은 왜 타국의 국왕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바쳤던 걸까요?
‘우리가 약속을 저버리고 도망친다면, 훗날 우리의 후손들은 아무도 이 일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 스위스 용병의 유서 中
당시 전사한 용병들의 품 안에서 위와 같은 내용이 담긴 유서가 발견되었다고 해요. 결국 척박한 자연환경 속에서 그들이 구축한 유일한 경제활동 수단인 ‘용병’일을 후대에까지 유지시켜주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성실하게 전투에 임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이 사건은 스위스 용병의 전사적인 신념과 충성심, 그리고 뛰어난 전투 능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며, 그들의 명성을 다시 한번 드높였어요. 하지만 약 800여 명에 달하는 용병 전원이 한 번에 전사하게 되면서 스위스의 용병제도는 큰 타격을 입게 되었죠. 이후 스위스는 타국에 용병을 제공하는 것을 더이상 허락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스위스 용병의 시대는 점차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 빈사의 사자상
스위스 루체른에 위치한 ‘빈사의 사자상’은 앞서 말한 튈르리궁의 대항전에서 신의를 지키기 위해 모두가 전사할 때까지 용맹하게 프랑스 국왕을 지켜냈던 스위스 용병들을 기리는 조각상이에요. 결과적으로는 전투에서 패배했더라도 그들의 충성심과 용감함은 결코 깨지지 않았음을 상징하고 있죠.
스위스의 조각가 베르톨트 토르발트센은 프랑스 부르봉 왕조 문양이 그려진 방패 위로 가슴에 화살이 깊이 박힌 채 고통 속에 생을 마감하고 있는 사자의 모습, 즉 스위스 용병들의 희생과 고통을 감동적이고 생생하게 표현했어요. 이를 본 19세기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도 감동적인 조각’이라는 평가를 남겼답니다.
빈사의 사자상 앞에는 작은 연못이 위치하고 있어 그 규모가 확 와닿지는 않지만, 실제 조각의 크기는 가로로 무려 10m, 세로로 6m에 달하는 거대한 사이즈랍니다. 조각상을 만들어 올려놓은 것이 아닌 거대한 바위를 깎아 만든 부조이기 때문에 단순한 조각상을 넘어 시대를 초월한 메모리얼로 인식되고 있어요.
사자는 자신의 갈기를 깎아지른 절벽 아래의 은신처에 드리웠다. 그는 절벽의 살아있는 돌에서 깎아낸 사자이기 때문이다. 사자의 크기는 웅장했고, 그 자세는 고귀했다. 그 어깨에는 부러진 창이 꽂힌 채, 사자는 고개를 숙이고서 그 앞발로 프랑스의 백합을 지키고 있었다. 절벽에 드리운 넝쿨은 바람을 따라 흔들리고, 절벽 위에서 맑은 샘물이 흐르다 저 아래 연못으로 떨어져내렸다. 수련이 핀 연못의 부드러운 표면 위로 사자의 모습이 비쳤다. 그 주변에는 녹음이 우거졌다. 이곳은 소음과 복잡함과 혼란에서 떨어져 차분한 숲의 구석에서 보호받고 있다. 이 사자가 죽어갈 곳으로는 예쁘장한 철제 난간을 쳐둔 소란스러운 광장의 화강암 받침대가 아니라 이곳이 걸맞았다. 루체른의 사자는 어디에 있든 인상적일 것이다. 하지만 이곳만큼 그의 모습이 인상적일 곳도 없으리라.
- 마크 트웨인 <유럽 방랑기> 中
사자의 위쪽에는 ‘HELVETIORUM FIDEI AC VIRTUTI’라는 라틴어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스위스(헬베티아)의 충성심과 용감함을 기리며’라는 뜻으로 스위스 용병들의 영웅적인 투쟁과 명예로운 죽음을 기리는 말이랍니다.
3. 스위스 용병단의 신뢰 (2) 바티칸의 근위대
# Sacco di Roma
15세기 무렵 바티칸은 이탈리아의 여러 국가들 사이의 정치 분쟁에 휘말려 있었고 교황의 안전 역시 계속해서 위협을 받고 있었어요. 이에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용맹함과 충성심의 상징인 스위스 용병단에게 바티칸 교황의 경호를 맡기게 되었습니다. 스위스 용병단은 교황의 경호뿐 아니라, 바티칸 시국의 안전을 위해 일하는 근위병으로도 활동하게 되었죠.
또한, 앞서 말한 프랑스 혁명 이전에도 스위스 용병단의 명성을 드높였던 사건이 벌어졌는데요. 1527년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의 군대가 ‘사코 디 로마(Sacco di Roma) 전투’를 벌여 로마를 약탈하던 시기, 큰 열세에 처했던 상황에서도 스위스 용병들은 교황 클레멘트 7세를 목숨 걸고 수호했습니다. 바티칸의 수많은 동맹들은 이런 저런 사정으로 오지 못하거나 도망쳤기에 오로지 스위스 용병단과 시민군만이 남아 로마의 성벽을 지키고 있었죠.
당시 교황이었던 클레멘스 7세는 스위스 용병단에게 이제 그만 조국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말했지만, 그들은 끝까지 남겠다는 맹세를 지켜야 한다며 교황의 권고를 거부했습니다. 마지막까지 교황이 피신할 시간을 벌며 처절하게 싸운 용병단은 결국 189명 중 147명이 전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요. 그들의 노력으로 클레멘스 7세는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었죠.
이러한 스위스 용병단의 헌신적인 행동은 그들의 충성심과 용감함을 대표하는 사례로, 자신들의 명성을 세계에 널리 알렸고 교황과 바티칸의 신뢰를 얻었어요. 그리하여 교황 바오로 3세 이후, 교황청은 오직 스위스 근위대만을 고용하도록 못을 박았고 이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답니다.
# 바티칸의 스위스 근위대
현재 바티칸의 근위대는 과거 스위스 용병단의 명예를 이어받아 전통을 이어가고 있어요. 스위스 근위대는 바티칸에서 교황의 안전을 확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의식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죠. 공식적인 행사나 행사에서 교황을 호위하고, 바티칸 시국의 경비를 맡고 있어요. 또한 교황의 개인 경비원으로서 교황의 개인 안전을 책임지며, 교황이 공공 장소를 방문할 때 안전을 보장하는 역할을 하고 있답니다.
스위스 근위대는 독특하고 화려한 디자인의 유니폼 때문에 주목을 받기도 하는데요. 이는 르네상스 시대의 전통적인 스위스 병사의 복장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해요. 파란색, 빨간색, 노란색 선명한 색상의 의복에 붉은색 풍선 모양의 깃털이 달려 있는 투구를 쓰고 고대 무기인 ‘할버드’를 들고 있죠. 스위스의 전통과 역사를 계속해서 기억하고 존중하며 근무하고 있으니 우리도 근위대에 대한 존중이 필요하겠죠?
이들에게 얽힌 역사나 복장 때문에 스위스 근위대가 그저 장식적인 존재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스위스 근위대의 일원이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에요. 후보자는 엄격한 물리적, 지식적, 그리고 도덕적 기준을 충족해야 하며 스위스에서 군사 훈련을 받은 후, 바티칸으로 이동하여 방어, 집단 전투 전술, 응급처치 등 근위대로서의 훈련을 다시 한번 받는답니다. 그 외에도 여러 조건들이 있는데 함께 살펴볼까요?
바티칸의 스위스 근위대가 되려면?
1) 스위스 출신일 것
2) 로마 가톨릭 신자일 것
3) 미혼이며, 19세-30세 사이일 것
4) 최소 5년 동안 복무할 수 있는 건강한 상태일 것
5) 군사 훈련을 받았거나 스위스에서 경찰 또는 경호로 일한 경험이 있을 것
6) 키는 174cm 이상일 것
7) 이탈리아어를 구사할 것
스위스의 이야기가 더 궁금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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