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램브란트 하우스 (Rembrandt House)

도시명
암스테르담
최종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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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편집 일시
2025/07/17 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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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 요약

화가 렘브란트가 약 20년간 거주하며 작품 활동을 했던 집으로 현재 박물관으로 운영중이에요. 내부는 17세기 가구와 작업도구, 그림 도구들로 꾸며져 있으며, 렘브란트가 실제로 그림을 그리던 아틀리에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에칭 작품, 드로잉, 제자들의 작품 등도 함께 전시되어 있어요.
기본 정보 예약 가능 뮤지엄 카드 가능- 예약 필요
21.50€ (뮤지엄 카드 소지 시 무료입장)
매일 10:00~18:00 *1/1, 4/26, 12/25 휴무 *8/16~8/24 운영시간 변동 10:00~19:00
Waterlooplein 역 51호선 53호선 54호선
Nieuwmarkt 역 51호선 53호선 54호선
*입장료와 입장 시간 등 운영 정보는 변동 될 수 있습니다. 방문 전 공식 홈페이지를 확인하세요.

티켓

공식 웹사이트예매 대행사이트 또는 현장에서 구입할 수 있어요. (현장은 대기 줄이 긴 경우가 많답니다!)
*렘브란트 하우스는 인기가 많기 때문에 사전 예약 후 방문하는 것이 좋습니다.

알고 가면 더 좋은 정보

렘브란트는 누구인가요?
17세기 네덜란드 황금기의 대표 화가로, 인물화, 특히 자화상과 빛을 활용한 드라마틱한 묘사로 유명합니다. 대표작으로는 ,야경>, <다비드와 우리야의 아내>, <수많은 자화상과 성경 이야기> 등이 있어요.
그는 해외에서 활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이탈리아 거장들과 네덜란드 예술가들의 작품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습니다. 초상화 화가로서 젊은 나이에 성공을 거뒀으나, 말년은 개인적인 비극과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특징지어졌죠. 그러나 그의 그림은 그의 일생 동안 인기가 있었고, 화가로서의 그의 명성은 여전히 높았고, 20년 동안 그는 많은 중요한 네덜란드 화가들을 가르쳤어요.
렘브란트의 비참한 말년
렘브란트의 첫 부인, 사스키아
렘브란트는 당대 최고의 화가였어요. 그에게는 흔히 있는 ‘가난하고 젊은 화가 시절’ 조차 없었죠. 그런데 왜 말년은 비참했을까요? 많은 자료가 이 부분을 생략하는 경우가 많은데, 어쩌면 '네덜란드 국민 영웅' 렘브란트를 만들기 위한 의도였을지 모릅니다. 그는 25세의 나이에 고향 레이덴에서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했어요. 빠른 시간 안에 명성을 얻었고, 그 당시 사교계 최고의 화가가 되었죠. 주요 인사들이 그에게 초상화를 의뢰했으며, 수강생도 몰려들었고 수업료는 부르는 대로 받을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20대 중반에 부를 이룬 그는 사스키아와 결혼했어요. 그녀의 아버지는 네덜란드 공화국의 법무장관이었는데, 젊고 부유한 두 사람은 세상 부러울 것 없는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습니다. 암스테르담에서 손꼽히는 부자로 살았고, 그들의 삶은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젊은 재벌처럼 호화로웠어요. 렘브란트의 대표작 ‘야경’은 그 행복의 정점에서 그려진 작품입니다.
33세 때 그는 현재의 렘브란트 하우스를 구입했어요. 넓었기에 생활하거나 일하기 충분했고 완벽했죠. 렘브란트와 사스키아는 사이가 좋았지만 네 명의 자녀 중 세 명이 출생 직후 사망했습니다. 사스키아도 건강 악화 끝에 29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는 아들 티투스가 자랄 때까지 재혼하면 유산을 받지 못할 거라는 유언장을 남겼어요.
하녀이자 보모, 헤이르티어 디르크스와의 악연
렘브란트의 삶에는 또 다른 여성이 등장합니다. 바로 하녀 헤이르티어 디르크스에요. 결혼 1년 만에 남편을 잃은 그녀는 사스키아가 죽기 직전 집에 들어와 티투스의 유모가 되었습니다.
부인 사스키아가 죽었을 때 렘브란트는 36세였어요. 그들은 거의 5년 동안 동거 하면서 부부처럼 살았죠. 렘브란트는 결혼까진 원치 않았다고 해요. 재혼을 하면 유산을 줄 수 없다는 사스키아의 각서도 있었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녀가 못생겼기 때문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녀의 초상화가 거의 남아있지 않은 것도 이와 관련 있을 것이라 추측되요.
하지만 새로운 하녀 헨드리키에 스토펠스가 들어오면서 헤이르티어는 쫒겨났어요. 이후 헤이르티어와 렘브란트는 지난한 법정 공방을 벌였습니다. 그녀는 렘브란트에게 생활비 소송을 걸었어요. 그는 우호적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했으나, 그녀가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소송은 렘브란트가 이겼어요. 사귀는 동안 사스키아의 반지 몇 개를 그녀에게 선물로 주었는데, 생활비와 소송비가 필요했던 그녀가 반지 중 일부를 전당포에 맡겼기 때문이었죠. 승리한 렘브란트는 헤이르티어를 여성 교도소에 수감시켰습니다.
헨드리키에 스토펠스
렘브란트가 말년까지 함께한 여성은 하녀 헨드리케 스토펠스에요. 두 사람 사이에는 딸 코넬리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곧 재정적으로 추락했어요. 1656년 파산했고, 52세에 19년간 살았던 집을 떠나 유대인 지구로 이사해야만 했죠. 헨드리케, 6세 코넬리아, 17세 티투스와 함께요.
하지만 렘브란트는 길거리에 나앉지 않았어요. 바로 ‘빚 떼먹기’ 기술을 쓴 덕분이죠. 그는 경매를 열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미술품과 골동품을 전부 판 뒤, 거액의 현찰을 헨드리케와 티토스에게 넘겼어요. 아 물론, 이 돈은 빚을 갚는 데 쓰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렘브란트는 경매를 여느라 빌린 장소의 임대료조차 주지 않았어요. 그리고 본인은 빚 독촉을 받지 않도록 파산 신청을 했습니다. 이후 헨드리케와 아들의 명의로 미술 공방을 열고 그를 고용하게 했어요. 이로써 렘브란트는 빚을 한 푼도 갚지 않으면서 재산을 고스란히 쓰며 살 수 있게 됐습니다.
하지만 렘브란트는 많은 일을 겪는 사이 확 늙어버렸어요. 가족들도 차례차례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죠. 1663년에는 15년 동안 사실혼 관계로 지낸 헨드리케가 세상을 떠났고, 아들도 1668년 27세에 병에 걸려 요절했어요. 렘브란트도 이듬해 전염병 때문에 63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렘브란트의 딸, 코넬리아는 결혼해 아이를 낳았지만 모두 일찍 죽어 버렸습니다.

 대장님의

 반 고흐 미술관이나 국립미술관과 묶어서 방문하면 네덜란드 예술사 흐름을 이해하는 데 좋아요.
 박물관 내부의 사진 촬영 가능 구역이 제한되어 있으니 주의해 주세요.

위치

함께 방문하면 좋을 장소

네덜란드 왕궁 H'ART박물관 대마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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